기고

손해배상 선진화 위한 큰 걸음

김제완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배상제의 확대를 위해 국회에서 여야 간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 제도는 미국 등 선진국이 오래전에 채택했고, 한국도 진작 도입했어야 하는 것으로서, 이미 20년 이상 심층 논의돼 왔다.

이 제도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경제학의 기본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안전은 항상 비용이 드는데, 누구나 소요되는 비용과 얻는 이익을 비교해 유리한 쪽을 선택한다. 기업도 ‘안전비용’과 ‘사고 후 배상비용’을 비교하여, 더 유리한 방안을 택한다. 그런데 소액의 다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 개인별 배상액에 비해 소송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커서 대부분 소송을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기업으로서는 비용을 들여 사고를 예방하기보다는, 사고 발생 후 끝까지 버티는 극소수의 피해자에게만 배상해 주는 편이 더 경제적이다.

김제완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제완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그러나 이는 정의롭지 못하다. 미국 법경제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소액 다수 피해자들에게 소송비용을 줄여주고 기업이 악의적인 경우 배상액을 확대해 비용과 효용의 균형을 잘 맞추면, 기업으로서는 더 경제적인 방안으로 ‘사고 예방’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선진국이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배상제를 두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한국에서 추진 중인 것도 같다.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송이 너무 많이 제기돼 기업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소(濫訴) 지적은 팩트에 반한다. 우리는 이미 2005년 증권거래법 분야에서 시범적으로 집단소송제를 도입했는데, 지난 16년간 제기된 집단소송은 전국적으로 총 10건 정도에 불과하며, 주가연계증권(ELS) 시세조종 사건 등 꼭 필요한 사건에서 소액 다수 투자자들을 잘 보호하고 있다. 징벌적 배상제 역시 가습기살균제사건, 개인정보 유출사건, BMW 화재사건 등을 계기로 제조물책임법, 개인정보법, 자동차관리법 등 몇몇 분야에만 ‘3배 배상’ 방식으로 완화되어 시범 도입되어 있다.

이번 법 개정의 취지는 이 시범적 성과를 바탕으로 국민들이 널리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 기업은 매출의 큰 부분을 미국 등 선진국에서 달성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 대부분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배상제가 매우 강력하다. 따라서 우리 기업은 수출품에 대해선 안전비용을 들여서 사고를 예방하지만, 국내용에는 안전비용과 배상에 인색하다. BMW와 같은 국내 판매 외국 기업도 마찬가지다. 한국 소비자에 대한 오랜 차별의 근저에는 손해배상법제가 있는데, 이미 불편함을 넘어 분노에 이르렀다.

재판으로 사회 갈등을 조장한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배상제하에서는 오히려 분쟁이 조기에 화해되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국에서는 이미 확인된 팩트이고, 우리도 ELS 시세조종 사건 등 주요 집단소송들이 화해로 종결됐다. 이 제도는 법원 감독하에 피해 집단에게 공평하게 배상금을 분배해 피해자들의 아픔이 더 이상 흑화되지 않게 한다. 이번 법안은 판결 효력을 적용받지 않겠다고 신고한 피해자를 제외한 모든 피해자에게 판결 효력을 적용하는 옵트아웃(opt out) 제도 등 지난 10년 이상 쌓인 성과와 논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근거 없는 우려보다는 따뜻한 격려로 손해배상법제의 선진화를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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