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회서비스원을 양치기 소년으로 만들 셈인가

김진석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서울여대 교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 창출, 그 가운데 사회서비스 분야 양질의 일자리 34만개를 만들겠다는 선언부터 일견 담대해 보였고, 시민들은 이 시작에 지지율 70%의 응원을 보냈다.

김진석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서울여대 교수

김진석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서울여대 교수

돌봄은 값싼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깊은 사회의 분위기로 인해 돌봄노동은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에 걸맞은 인정과 보상을 누리지 못했다. 돌봄노동은 기껏해야 ‘남는’ 시간에 하는 조각 노동에 불과했고, 돌봄노동의 전문성과 돌봄의 질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경험의 축적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돌봄의 질이 열악한 채 정체된 공간에서 돌봄과 일상생활 지원을 필요로 하는 아동, 노인, 장애인 등 주민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사회서비스원은 문재인 정부가 주민에게 약속한 사회서비스 분야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실현하는 데 핵심고리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나서서 “사회서비스원을 통해 공공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및 사회서비스 제공 인력 처우 개선”과 “국민이 체감하는 사회서비스 품질 향상”을 실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주민은 그 약속을 아직 믿고 있다.

민간 공급자들끼리 마냥 평온하게 운영해오던 시장에 어쩌면 공룡이 될지도 모르는 공공이 진입한다니 기존의 공급자들은 날카로운 경계심을 보였고, 극렬히 반대했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서울 등 몇몇 지자체에서 사회서비스원을 설립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거기까지였다. 사회서비스원 근거법 제정이 3년 넘게 국회에서 지지부진한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민간이 주도해온 사회서비스 공급 구조 변화와 제도 혁신의 계기로 기대받던 사회서비스원은 근거법 부재와 제한적인 정부 지원 속에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사회서비스원 설립과 운영을 책임져야 할 지자체들은 벌써부터 발을 뺄 구실을 찾기에 바쁘다. 사회서비스원에 대한 주민과 돌봄노동자들의 관심도 시들해지고 있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던 민간 공급자들은 이미 표정관리에 들어간 모양새다. 이대로라면 사회서비스원은 거대한 헛소동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려 한다면 사회서비스원법의 제정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법의 제정을 통해 정부와 지자체가 사회서비스원의 설립과 운영에 예산과 인력을 투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현장에 명확한 신호를 주어야 한다. 근거법조차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서비스원 설립은 동력을 현저히 잃을 것이 자명하며, 이미 설립된 사회서비스원의 경우 결과적으로 운영 책임자인 지자체에 부담을 떠넘기는 안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이다.

사회서비스원의 설립과 운영에 적절한 정책 환경의 마련은 현 정부와 주민의 약속 이행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돌봄과 일상생활 지원 등 다양한 사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주민에게 ‘내 삶을 책임지는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제도적 퍼즐을 완성하는 데 사회서비스원은 핵심적인 조각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 조각이 빠진 채 복지국가의 그림을 완성하기는 더욱 난망이다.

다가오는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에 내놓을 새로운 약속의 꾸러미들을 준비하는 데 너나없이 바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지키지 못한 약속이 산적해 있는 판에 새로운 약속의 꾸러미를 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주문한 상품이 도착은커녕 이렇다 할 소식조차 없는데 누가 또 거래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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