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김학순 할머니 ‘위안부 증언’ 30주년, 일본은 응답하라

위안부 피해를 처음 알린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1991년 8월14일) 30주년을 이틀 앞둔 12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김 할머니의 생전 사진과 고무신 등이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위안부 피해를 처음 알린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1991년 8월14일) 30주년을 이틀 앞둔 12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김 할머니의 생전 사진과 고무신 등이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역사의 침묵을 깬 것은 용기였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이 몸소 겪은 사실임을 처음 알렸다.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과 방관해온 한국 정부를 향해서는 “살아있는 내가 바로 증거”라고 했다.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나섰다는 김 할머니는 결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온몸을 던진 67세 할머니의 외침이 세상을 깨운 날이었다.

그날로부터 진실의 역사가 시작됐다. 김 할머니를 뒤따른 240명이 위안부 피해자로 국가에 이름을 등록했다. 해방 후 반백년이 흐르도록 감춰온 아픔과 한을 국가적 폭력에 당한 일로 공인받고, 할머니들 스스로 피해자·생존자를 넘어 증언자·활동가로 거듭났다.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시민단체(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출범하고, 1992년 1월 시작한 수요시위는 1504차례 이어져 세계에서 단일 주제로 가장 오래 가는 집회가 됐다. 위안부를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문제로 일깨운 도쿄 국제법정과 미 하원 청문회가 열리고 곳곳에 소녀상도 세워졌다. 이 모든 출발점이 된 김 할머니의 첫 증언일은 세계가 함께 기억하는 ‘위안부 기림의날’이 됐다. 오직 30년 전 그날 “일본의 사죄를 받으면 족하니 나를 사용하라”던 할머니의 말만 미완의 꿈으로 남았다.

위안부 운동은 다시 기로에 서 있다. 지난해 5월 불거진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전 이사장의 불투명한 보조금·기부금 관리 문제는 큰 오점을 남겼다. 2015년 피해자를 배제한 채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 후 정부 간 대화는 겉돌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위안부 피해자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그들이 원하고 동의하는 ‘피해자 중심’ 방식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법적 배상을 받는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위안부 기림의날인 14일 국내외에서는 기념행사가 이어진다. 미래 세대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엔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앞으로도 진실을 왜곡하는 ‘제2의 램지어 교수’, 소녀상을 철거하려는 ‘제2의 베를린시’는 나타날 수 있다. 그때마다 일본의 획책·지원·압박을 이겨낸 것은 시민의 연대였다. 이제 14명밖에 남지 않은 생존자를 살피고, ‘위안부 없는 시대의 위안부 운동’을 준비하는 것도 모두의 몫이 됐다. 30년 전 “부끄러운 것은 내가 아닌 가해자 너희”라고 한 김 할머니의 외침에 일본은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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