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다음주 미국을 공식 방문한다. 그는 1주일 동안 미국에 머무르며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상하원 의회 연설, 현지 일본 자동차 생산공장 방문 등을 할 예정이다. 주일미군 위상 강화부터 군사장비 공동개발, 일본의 남중국해·대만해협 역할 확대까지 동아시아 안보에서 일본의 존재감을 더 키우는 양국 정상 간 합의가 다수 발표될 것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의 미·일관계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거란 관측이 많다.
기시다 총리의 이번 방문은 일본이 동아시아를 넘어 미국의 글로벌 전략에서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일 동맹 강화는 두 국가 사이의 일이고, 양국 모두에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동아시아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한국 시민들로서도 남의 일 보듯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미·일은 근현대 한반도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던 나라들로, 지금도 한국의 지정학적·전략적 운신의 폭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
우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기시다 총리의 미 의회 연설에서 과거사 반성 언급이 없을 거라는 일본 언론의 보도이다. 과거사 문제는 “일단락된 것이기에, 이번 연설에서 언급하지 않는다”(일 외무성 관계자)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9년 전 아베 신조 총리의 미 의회 연설에서도 불충분하나마 과거사 문제가 언급됐다. 동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도 일본의 식민지배와 제국주의 침략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살아 있고, 일본 내 역사 인식이 퇴행하는 상황에서 과거사 반성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문제 있다. 그러면서 일본이 어떠한 제동 장치도 없이 군사력을 키우고,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과거사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일본 정부 인식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를 피해자와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모두 해결됐다고 말하며 일본의 과거사 책임에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협력을 얻기 위해 그랬다고 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국이 일본과 적절히 협력하면서도 그들에게 과거사를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번 기시다 총리의 방미 행보에 윤 대통령은 박수만 치고 있을 것인지 지켜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