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왜 하치무라 루이가 없나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곤자가 대학. 미국 워싱턴주 스포캔에 있는 농구의 명문이다. ‘3월의 광란’이라 불리는 대학농구(NCAA) 토너먼트에 최근 24년 동안 개근 출전했으며, 재작년에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올해도 대회 전 우승 예상 4위일 정도로 기대를 모았으나, 아쉽게도 8강전에서 패해 탈락했다. 곤자가 대학이 역사상 첫 우승까지 노릴 수 있었던 것은 하치무라 루이라는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국적의 3학년 학생이다. 203㎝, 104㎏의 당당한 체격을 가진 그는 올여름,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진출하는 첫 번째 일본 선수가 될 전망이다.

[정동칼럼]한국엔 왜 하치무라 루이가 없나

하치무라는 혼혈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쳤지만 아버지는 서아프리카의 베냉공화국 출신이다. 일본에서는 혼혈을 ‘하프’라 부르곤 하는데, 스포츠계에는 뛰어난 ‘하프’가 많다. 얼마 전 세계 테니스 랭킹 1위에 오른 오사카 나오미는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결혼을 끝까지 반대한 외조부모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오사카가 10살이 넘도록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연이 있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유 다르빗슈의 아버지는 이란인이고, ‘일본 단거리 육상의 미래’로 불리는 사니 브라운 압델 하키무의 아버지는 가나인이다.

우리나라에도 혼혈 운동선수가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 엘리트 선수가 된 경우는 많지 않다. 하인즈 워드처럼 어릴 적 미국으로 건너가 외국인으로 남았거나 문태종, 이승준처럼 외국에서 자란 후 성인이 되어 귀화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1970년대 농구계를 주름잡았던 김동광 선수가 있긴 하다). 국제결혼의 역사가 짧은 탓만은 아니다. 다문화가정의 수많은 아이들이 능력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 탓도 적지 않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국제결혼의 빈도를 보면 한국과 일본은 큰 차이가 없다. 비율로 보면 오히려 우리나라의 국제결혼율이 더 높다.

통계청 조사자료를 보면, 2017년 한 해 동안 탄생한 한국인-외국인 결혼 커플은 2만 쌍이 넘는다. 피크였던 2005년에 비하면 반 정도로 줄었지만 여전히 전체 혼인의 8% 이상을 차지했고, 다문화 출생아 수는 전체 신생아의 5.2%였다. 새로 태어나는 20명 가운데 한 명은 혼혈인 셈이다. 우리나라 전체 초등학생의 3.1%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도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미 우리 사회는 다양한 인종의 한국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평범한 백인 미국인들이 사흘 동안 타 인종과 한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이민자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이민에 대한 반대 의견이 강해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하버드대 계량사회과학 연구소의 라이언 에노스 교수의 실험이었다. 그러나 열흘 이상 같은 버스를 타자 무조건적인 반감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접촉이 잦아질수록 까닭 없는 공포나 오해는 감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3년 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 중 이웃에 외국인이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답변이 25%였다고 한다. 중국의 10.5%보다도 훨씬 높았다. 옆에서 자주 보기를 원하지 않으니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 이외의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까지.

우리나라에도 하치무라 루이가 왜 없겠는가. 14살의 한국인 온예카 오비 존은 아버지가 나이지리아인이고 12살 원태훈은 아버지가 모로코인이다. 둘 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축구 유망주이다. 이들이 쑥쑥 자라서 제2의 박지성이나 손흥민이 되길 기대하지만, ‘다문화’가 또 다른 차별의 단어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마냥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농구나 축구뿐 아니라 음악, 수학, 문학, 모두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자원들이 많아도 우리는 그들에게 여간해서 곁을 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으로 밀어낸다. 미국 프로농구에서 뛰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알론조 트리어의 어머니는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된 한·흑 혼혈이다. 그 어머니가 한국에 남아 있었어도 트리어 같은 아들을 길러낼 기회가 주어졌을까?

하치무라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반은 아프리카인이고 반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며 “일본에 있는 수많은 ‘하프’들에게 꿈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하프’들이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문화란 그런 거다. 베트남 새댁이 이제 김치 없으면 밥 못 먹는다며 박수 치는 것이 아니라 그 2세들이 베트남 혈통을 자랑스러워하는 건강한 한국인이 되도록 격려하는 것이 다문화다. 그렇게 격려하다 보면 스포츠계에서도 과학계에서도, 그리고 법조계와 의료계에도 ‘롤 모델’이 되는 다혈통 한국인이 많이 배출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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