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의 비운과 서울시장

박문규 논설위원

공항로를 따라가다 발산역 근처에 이르면 길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벌판을 만나게 된다. 현재 개발사업이 한창인 마곡지구다. 과거 삼(麻)을 주로 키웠다고 해서 마곡(麻谷)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서울의 마지막 곡창지대였다. 서울에서 벼농사를 짓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마냥 신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근 “마곡지구에 한국을 대표하는 보타닉 공원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보타닉 공원은 식물원과 도시공원을 합친 개념이라고 한다. 여의도공원 2배 크기의 새 도시공원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공원 이름은 가칭 서울화목원으로 결정됐다.

서울시장의 공원(公園) 사랑은 유별나다. 역대 5명의 민선 시장은 모두 자기 이름표를 단 공원을 하나 이상씩 갖고 있다. 도시공원에 처음 눈을 돌린 사람은 조순 시장이다. 여의도공원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나무를 심겠다는 발상 자체가 파격이었다. 매년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던 군사정권의 상징물을 허물겠다고 했으니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뒤 이은 고건 시장은 월드컵공원을 만들었다. 이명박 시장은 서울숲과 청계천공원에 자기 이름표를 붙였다. 오세훈 시장도 옛 드림랜드 부지를 사들여 북서울 꿈의숲을 조성했다. 민선 시장이 공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청와대만 바라보던 관선 시장과는 확연히 다른 풍속도다. 큰돈 들이지 않고 자기 이름표를 새길 수 있는 사업 중 공원만 한 것도 없다. 차기 대권의 꿈을 가진 서울시장 입장에서 보면 녹색사업이 갖는 친환경 및 서민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효과도 있다.

[경향의 눈]마곡의 비운과 서울시장

서울화목원은 온전히 새로운 공원은 아니다. 마곡지구에는 공원부지가 따로 지정돼 있었다. 이곳에 어떤 개념의 공원을 앉힐지를 결정한 것뿐이다. 어쨌든 박 시장도 자기 이름을 내건 공원 하나를 갖게 된 셈이다. 사실 서울화목원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공원 조성계획이 확정되면서 전체 360여만㎡(110만평) 규모의 마곡지구 개발계획이 완성됐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마곡지구는 상처받은 땅이다. 이곳만큼 서울 도시개발사의 생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도 드물다. “마곡지구를 보면 역대 시장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얘기가 빈말이 아니다. 마곡지구 개발 계획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94년이다. 이원종 시장이 서울을 용산·마곡·상암·뚝섬·여의도 5개 권역으로 나눠 개발하는 5대 거점 개발계획을 만든 게 시초다. 지난 20년간 서울시를 거쳐간 시장은 8명이다. 이들이 마곡지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곳만 한 노른자위 땅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울의 마지막 남은 미개발지가 마곡지구다. 요란한 개발사업에 자기 이름표를 붙이고 싶은 서울시장이라면 100만평 넘는 빈땅을 놀려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면에서 조순 시장은 별종에 가깝다. 취재현장에서 지켜본 그에 대한 평판이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치적 중 눈에 띄는 것을 꼽으라면 마곡지구 백지화다. 그는 ‘후세들에게 물려줄 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5대 거점 개발지 중 마곡지구만 제외했다.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땅을 사용하고 난 뒤 정작 필요할 경우 땅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취지다. 대권을 꿈꾸며 여론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던 그가 ‘미래세대를 위한 배려’라는 말을 꺼낸 것 자체가 신선했다. 이후 마곡지구는 역사 속에 묻혔다.

10년 후 토건사업 전도사인 이명박 시장이 들어섰다. 그는 취임 초만 해도 “마곡지구는 후세를 위해 남겨둬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다짐은 불과 몇 달 가지 않았다. 그는 곧 “마곡지구 개발 청사진을 마련하겠다”며 말을 바꿨다. 이어 마곡지구를 한국의 대표적인 산학 연구·개발단지로 개발하는 계획안을 내놨다. 퇴임 6개월을 앞두고 내린 결정이다. 마곡지구가 다시 개발 광풍에 휘말린 것이다. 오세훈 시장은 바통을 넘겨 받아 마곡지구를 한강르네상스 계획과 연계해 미래형 산업단지로 만드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졸속 개발이 부른 마곡지구의 현주소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사업을 주관한 SH공사는 빚더미에 앉아 서울시 재정의 숨통을 죄고 있다. 첨단 연구·개발벨트가 될 거라던 청사진이 무색하게 산업단지 분양률은 30%를 밑돌고 있다. 미국의 벨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를 유치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세계 곳곳을 돌았지만 세계적인 연구소를 옮겨올 외국 기업은 거의 없다. 흙먼지 날리는 마곡지구를 되돌릴 길도 없다. 서울의 마지막 금싸라기땅이 애물단지로 변하는 데는 불과 몇 년 걸리지 않았다.

서울의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지난 20년간 머릿속에서 마곡지구에 대한 수많은 밑그림을 그리고 또 지웠다. 여백의 미가 가져다 주는 행복함에 젖어 살았다. 후세를 위해 남겨둔 땅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하지만 요즘 들어 마곡지구를 지날 때마다 이명박·오세훈 시장이 원망스럽다고들 한다. 서울의 꿈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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