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기억투쟁

서영찬 사회부장

이봉운 할머니. 그는 꽃다운 나이에 중국 헤이룽장성 스먼즈(石門子)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1945년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은 그를 중국땅에 버려두고 철수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그는 현지 중국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던 그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오갈 데 없어진 그는 남편의 친척집에 얹혀 살았다.

[아침을 열며] 위안부 기억투쟁

<헌병이었던 아버지가 남긴 것(憲兵だった父の遺したもの)>이라는 책에 실린 이봉운 할머니의 사진을 잊을 수 없다. 한 촌로와 함께 온돌 위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증언이라도 하는 듯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다. 수척한 얼굴과 추레한 옷차림은 궁핍함 속에서 신산한 삶을 이어오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책을 쓴 구라하시 아야코(倉橋綾子)는 아버지의 충격적 유언을 좇아 중국 벽촌 스먼즈까지 가서 이봉운 할머니를 만났다. 구라하시의 아버지는 제국 일본군 헌병으로 만주 등지에서 복무했는데 당시 복무지의 중국인과 조선인을 수소문해서 자신의 사죄를 전달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구라하시가 2000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만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위안부 피해자 이봉운 할머니다.

이 할머니의 존재는 구라하시보다 1년여 앞서 나눔의집에서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다. 이봉운 할머니는 기억 바깥에 묻혀버린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길원옥 할머니. 평양 태생으로 일제 때 만주 하얼빈으로 강제연행돼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 후 귀향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의 역사적 증언자로 살아오고 있다. 정대협의 수요시위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그가 지난 8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12일 동안 워싱턴과 뉴욕 등지를 돌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다시 한번 환기하기 위함이다.

휠체어를 탄 89세의 노구가 소화하기엔 녹록지 않은 여정이다. 그가 힘겨운 미국행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지난해 12월 이뤄진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 탓이 크다. 위안부 문제를 정의롭게 풀어내기는커녕 봉인하려는 듯한 한·일 정부의 태도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크게 실망했었다. 길원옥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길 할머니는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 합의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다녔다. 거기엔 위안부라는 역사적 문제를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는 절규도 담겨있다.

망각할 것인가, 기억할 것인가. 역사는 ‘기억투쟁’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기억투쟁의 양태는 한 집단의 지향점과 문제점을 가늠케 한다. 아우슈비츠나 세월호를 둘러싼 사회적 현상도 기억투쟁의 일면이다. 위안부 문제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영화 <귀향> 예매율은 여전히 상위권에 머물러 있다.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적잖은 시민들이 몇 달째 ‘평화의 소녀상’ 곁을 지키고 있다. <귀향>을 보러 극장을 찾는 시민과 소녀상 옆에서 농성하는 시민의 행동은 ‘위안부’를 기억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총선 유권자 운동으로 결집한 대학생들은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위안부 역사를 둘러싼 기억투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가 촉발한 기억투쟁은 쉬이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얼마 전 위안부 기억투쟁에 기름을 붓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뺀 내년 고교1학년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기술이 “위안부로 전쟁터에 보내졌다”로 바뀐 것이다.

‘독도는 일본 고유 영토’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 도발이 또다시 고삐 풀린 형국이다.

우리 정부는 갑자기 뒤통수 맞은 표정으로 “개탄한다”는 성명을 냈지만 그 말은 공허해 보인다. 왜냐하면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비롯, 수차례 과거사 대응에서 박근혜 정부가 무능하게 대처했다는 비판 목소리가 큰 상황이기 때문이다.

역사 왜곡으로 치닫는 일본의 고삐를 잡아채고 올바른 역사 논의로 이끌 의지와 대책이 정부에 있는 걸까. 정부가 길원옥 할머니와 시민의 기억투쟁과 엇나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길원옥 할머니는 어제 고단한 기억투쟁을 마치고 귀국했다. 12일간의 여정이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건 귀국길 할머니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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