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서영찬 사회부장

일주일이 넘었다. 낮밤 없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주변엔 추모와 울분이 식지 않고 있다. 한동안 그 맞은편에선 경찰 병력이 장벽을 쳤었다. 고 백남기씨의 부검을 집행하려는 경찰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우고 ‘물대포 사망의 진실’이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려 한다. 경찰은 부검으로 사인을 밝히는 게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말한다. 유족의 반대는 아랑곳없다. 백씨 죽음의 진실을 독점하겠다는 의지로 비친다는 비판이 틀려 보이지 않는다.

[아침을 열며]비밀은 없다

백씨가 숨진 후에도 경찰은 사과를 거부했다. 되레 유족과 맞서고 있다. 국가 공권력이 한 시민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생생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부검영장 집행 유효기간은 이달 25일까지다. 갑작스러운 충돌 가능성은 줄었지만 경찰과 유족은 앞으로 긴 시간 동안 평행선을 달릴 게 뻔하다. 어느 추모자가 빈소 주변에 붙인 포스트잇에는 “국가란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백씨는 공권력의 민낯을 증언하고 있다.

엊그제 서울대 의대생 100여명이 성명서를 내놨다. 이들은 백씨의 사망원인을 ‘병사’로 분류한 서울대병원 측의 사망진단서가 오류임을 조목조목 짚었다. 인터넷에는 당뇨 환자가 차에 치여 죽었다면 사망원인을 당뇨로 봐야 하느냐는 비아냥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성명서에서 후배들이 이런 문제는 의사 국가고시에도 나오는 기본적 사항이라고 지적하자 사망진단서 작성자인 병원 측은 뜨끔했을지 모르겠다. 의대생들은 명백한 오류가 발견됐는데도 선배 의사들은 왜 이를 바로잡지 않는지 물었다.

서울대 의대 졸업생들도 뒤이어 후배들의 입장에 동참했다. ‘병사·외인사 논란’이 커지고, 사망진단서 작성에 외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추측이 난무한다.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을 초래한 건 물대포를 직사한 장본인일 것이다. 권력기관이 백씨 죽음의 진실을 독점하려면 할수록 갈등만 조장할 뿐이다. 부검은 결자해지가 아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 10일 만에 전경련은 두 재단을 10월 중 해체하고 재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예고된 일정을 앞당긴 전경련의 재통합 계획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배경설명은 없다. 해체 발표 전날엔 최순실씨와 친분이 있는 K스포츠재단 이사장이 사퇴를 밝혔다. 설립 과정처럼 해체 수순도 전광석화처럼 진행되는 꼴이다. 이제 두 재단 의혹의 한가운데 청와대가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특유의 모르쇠로 일관한다. 두 재단 해체 발표가 있기 며칠 전 재단에 돈을 댄 대기업에서 재단 관련 자료를 서둘러 폐기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서류는 파쇄하고 e메일은 삭제했다는데 그 속에 모금과 운영의 실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허둥지둥 감추고 지우는 그들에게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최근 스폰서 뇌물 의혹을 받은 김형준 부장검사가 구속됐다. 그는 구속 전까지 자신을 향한 의혹들에 손사래 쳤다. 때론 적극 항변했다. 하지만 수사 결과 낯뜨거운 5000만원의 실상이 드러났다. 진경준 전 검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비리를 감출 수 없었다. 잘나가던 두 검사의 추락이 가르쳐주는 것은 자명하다. 멀든 가깝든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권력기관 안팎에서 이러저러한 의혹들이 연이어 모락모락 나온다. 그 뒤에 있는 진실을 감추고 뒤틀려는 시도도 뒤따른다. 그지없이 답답한 가을이다.

그런데 이런 답답함을 시원하게 해소하는 말이 뜻밖의 곳에서 들려왔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김수남 검찰총장이 지난달 30일 대검찰청에서 열린 청렴 서약식에서 한 말이다. 이 행사는 김영란법 시행에 즈음하고 스폰서 부장검사 비리 파문을 사과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는 말은 검찰은 물론 청와대와 경찰을 향해서도 일침을 가하는 말로 읽힌다. 애당초 공직자의 청렴성을 주문한 말이지만 진실 은폐 행위는 부질없다고 이르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덧붙여 후한시대 양진의 사지(四知)고사를 인용했다. 양진이 한 지방에 자사로 부임하자 고을 수령이 심야에 은밀히 찾아와 금덩이를 뇌물로 제공하더란 것이다. “밤이라 아무도 모른다”며 뇌물을 건네는 수령에게 양진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면서 던진 충고는 이렇다.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안다.” 이 사지고사가 청렴에 대한 교훈으로만 머물진 않을 것이다. 허물을 은폐하려는 권력기관의 비밀주의에 대한 일침으로 봐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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