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실미도 ‘대독 사과’

안홍욱 논설위원
1971년 8월23일 실미도 부대원들이 탈취한 시외버스를 타고 청와대를 향하다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한 뒤 사건 현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8월23일 실미도 부대원들이 탈취한 시외버스를 타고 청와대를 향하다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한 뒤 사건 현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가는 국민의 생명·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때론 국민을 배신해 폭력을 자행했다. 해방 후 제주 4·3, 한국전쟁 기간 중 거창·산청 양민 학살,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 등 한국 현대사는 국가폭력 사례로 얼룩졌다. 국가는 다수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며 폭력을 정당화했다. 피해자들이 국가의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국가폭력의 은폐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2005년 출범했다. 진실화해위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인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국가의 공식 사과를 권고했다. 두 달 뒤인 2008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2020년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는 10건 이상의 국가폭력에 대해 정부의 사과를 권고했지만, 정부는 사과에 인색했다.

실미도 사건 역시 감춰진 국가폭력이었다. 1968년 4월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해’ 북파공작원 훈련소, 일명 ‘실미도 부대’(공군 제2325분대 209파견대)가 창설됐다. 가혹한 처우에 시달린 부대원 24명이 1971년 8월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탈출해 청와대로 향했다. 서울 진입 과정에서 벌어진 군경과의 교전에서 부대원 20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4명은 이듬해 3월10일 경기도 벽제 인근에서 처형됐다. 군은 시신을 가족에 인계하지 않고 암매장했다. 영화 <실미도>는 부정확한 고증 때문에 비판도 받았음에도, 국가폭력의 은폐된 진상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면서 한국 개봉 영화 최초로 1000만명 관객을 넘었다.

정부가 53년 만에 실미도 사건에 대해 처음 사과한다. 오는 9~10월 4명에 대한 암매장 유해 발굴 개토제 행사에서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22년 진실화해위가 권고한 사과를 이제서야 이행하는 것이다. 사과문은 신원식 국방부 장관 명의인데, 국방부 군인권개선추진단장이 대독하기로 했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사과를 아랫사람에게 대독시키겠다는 협량함이 한심스럽다. 격식과 예를 갖추지 않는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반세기도 넘은 유족들의 피맺힌 한을 달래기 위해 장관이 당당하게 나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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