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미군정 지배를 받다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다음날 ‘미·일 안보조약’을 맺었다. 국권 회복과 동시에 미국의 ‘기지국가’가 된 일본이 외교안보에서 미국이 그어둔 선을 넘는 일은 드물었다.
그 선을 넘다 몰락한 대표적 인물이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다. 1970년대 초 미·중 데탕트가 무르익자 다나카 총리는 미국보다 7년 앞선 1972년 중국과 깜짝 수교를 단행했다. 미국은 일본의 ‘추월’이 괘씸했다. 다나카는 내친걸음으로 시베리아 유전 개발을 목적으로 소련에 접근했다. 다나카의 ‘자원외교’는 동서 대립이라는 냉전질서를 훼손하는 것이어서 또 다시 미국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결국 미국 록히드 항공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기세가 꺾였다.
다나카의 ‘정치적 아들’인 오자와 이치로 전 민주당 간사장도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 오자와는 1993년 펴낸 <일본개조계획>을 통해 ‘보통국가론’을 주창했는데, 미·일 동맹 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나자는 취지가 담겼다. 그는 엄청난 수완으로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를 붕괴시킨 정치개혁을 주도했으며 민주당에 합류해 2009년 정권교체의 주역이 됐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함께 미·일관계 전환을 꾀했던 오자와 역시 미국·일본 내 기득권 세력의 집중 견제를 받았고, 검찰의 집요한 정치자금 수사를 받으면서 실각했다.
지난 1일 총리직에 오른 이시바 시게루도 대등한 미·일 동맹을 주장하며 다나카의 정치적 제자라는 점에서 오자와와 닮았다. 한국에는 “납득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는 지한파 정치인이다. 파벌정치에 거리를 두며 아베 비판의 선봉에 섰던 ‘비주류’ 이시바가 총리로 선출된 건 정권교체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총리가 된 지 26일 만에 치러진 중의원(하원) 총선에서 자민당이 참패했다. 비주류 한계를 극복하고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중의원 조기해산과 총선을 단행했으나, 자민당의 구습이던 비자금 문제에 발목이 잡혔다. 일본 정치 관행에 비춰 이런 성적이면 ‘자기 정치’를 펼치기는커녕 퇴진 압력에 시달리다 단명 총리가 될 공산도 있다. 아베 색깔과 다른 일본 정치를 기대했던 이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