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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적] 보편적 시청권
    [여적] 보편적 시청권

    ‘국민영웅’은 늘 TV 속에서 걸어나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사상 첫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박지성이 그랬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손흥민이 찔러준 공을 감각적인 슛으로 연결해 포르투갈 골망을 갈랐던 황희찬이 그랬다. 골을 넣은 후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던 박지성, 상의 탈의 후 ‘알통 세리머니’를 펼친 황희찬을 많은 이들이 떠올릴 것이다.올림픽과 월드컵은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이벤트다. 시민은 같은 시간, 같은 화면을 보며 같이 울고 웃는다. 구성원들이 공유한 경험은 공동체의 기억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 시대적 서사로 자리 잡는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보편적 시청권’ 덕분이다.방송법이 규정한 보편적 시청권은, 국민적 관심이 큰 스포츠 경기나 주요 행사(국민관심행사)를 일반 국민이 시청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문제는 기존의 보편적 시청권이 지상파 방송 중심의 미디어 환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23시간 전

  • [여적]AI엔 없는 망설임
    [여적]AI엔 없는 망설임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좋은 이웃’에는 2020년 전후 아파트값 폭등 때 집을 사지 못해 세입자 신세인 40대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신혼 초 ‘우리 시작을 이웃과 함께하자’며 유니세프 정기 후원을 권했던 남편 호준은 요즘은 한강을 건너는 출근길 풍경이 다 돈으로 보인다고 아내 주희에게 말했다. 주희는 ‘그래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쥔 게 있는 세대잖아’라고 답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재택 독서지도사로 일하는 주희는 방문 학습지교사 시절 인연을 맺은 학생 시우를 여전히 가르치고 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시우는 서울 변두리 낡은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다. 하루는 수업 뒤 옆 동네에 새로 생긴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가게 됐다는 시우 어머니 말을 듣고 주희는 마음이 허전하고 휑해졌다. 이런 감정을 품은 스스로에 수치심을 느낀 주희는 얼마 전 남편이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곧바로 이런 질문이 머리를 채웠다. “그...

    2026.04.20 18:20

  • [여적] ‘98년생 김현진’
    [여적] ‘98년생 김현진’

    2016년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고 싸워왔던 김현진씨가 세상을 등졌다. 김씨의 변호를 맡았던 이은의 변호사는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짧았지만 빛나고 뜨거웠던 98년생 김현진님의 작별을 전한다”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알렸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과거를 잊고 살려 했으나 너무 힘에 부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2023년 11월 가해자인 시인 박진성씨가 실형을 선고받은 뒤 경향신문과 인터뷰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시인을 꿈꿨던 김씨는 시 강습으로 알게 된 박씨로부터 여러 차례 언어 성폭력을 당했다. 당시 김씨는 17세 고등학생이었다. “거리를 걸으며 손잡자” “애인 안 받아주면 자살한다”, 어린 학생에게 박씨가 보낸 메시지는 무도한 것이었다. 김씨는 문단 내 성폭력 미투 운동이 일어나던 2016년 10월 트위터에 ‘박씨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했다.박씨는 사실이 폭로되자 반성은커녕 ‘무고’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소셜미디어에 ...

    2026.04.19 19:11

  • [여적]이주노동자의 지워진 이름
    [여적]이주노동자의 지워진 이름

    한국의 직장에서 여성들이 이름 대신 ‘미스 김’ ‘미스 리’ 등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영미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붙이는 ‘미스(Miss)’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을 낮춰 부르는 말이었다. 본뜻에 상관없이 결혼을 해도 한번 ‘미스 김’이면 영원히 ‘미스 김’으로 불렸다. ‘미스’ 호칭엔 여성 비하와 차별적인 시선이 은연중에 담겨 있다. 남성을 도와 허드렛일이나 하는 무명의 존재로 여겼기에 통용되는 호칭이었던 것이다. 입사 동기인 남성 동료들조차 “미스 김, 커피 한잔” 하기 일쑤였다. 그냥 이름을 불러달라고 해도, 숙녀 이름을 어떻게 마구 부르냐며 굳이 ‘미스’라는 호칭으로 당사자를 거슬리게 하던 것이 엊그제다.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명성의 호칭은 지금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뭉뚱그리는 데 쓰인다. ‘아저씨’ ‘이모’ 등으로 부르는 것은 위아래를 따지는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 정도만 돼도 견딜 만하다. “야! 이 ○○ ...

    2026.04.16 18:15

  • [여적] 촉법소년
    [여적] 촉법소년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범죄자니까. 그 나이에 감히 범죄를 저질렀으니까.”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주인공 심은석 판사(김혜수)는 말한다. 그의 아들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가해자는 초등학생들이었다. 담당 재판장은 사건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보지도 않고 3분 만에 재판을 끝냈다.충격을 받은 심은석은 소년부로 옮긴다. 소년법상 가장 강력한 보호처분인 ‘10호 처분’(장기 소년원 송치)을 쏟아내 ‘십은석’이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혐오에서 멈추진 않는다. 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의 이면을 살피고, 사건마다 각별한 노력을 쏟아붓는다. “싫어하고 미워할지언정, 소년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할 겁니다.”형법 제9조는 “14세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형사미성년자에 대한 조항이다. 이들도 연령대별로 나뉜다. 만 10세 미만은 형사재판도 소년재판도 받지 않는다.만 10세~14세 미만은 ‘촉법소년’으로 분...

    2026.04.15 18:14

  • [여적]트럼프의 신성모독
    [여적]트럼프의 신성모독

    “너는 선택된 자였어(You were the Chosen One)!”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에서 어둠의 세력에 물들어 ‘다스베이더’로 변신한 아나킨에게 스승인 오비완 케노비가 외친 대사다. <스타워즈> 시리즈 팬들에겐 가장 눈물 나는 장면이기도 하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유명한 대사를 빌린 적이 있다. 2019년 8월21일 미·중 무역전쟁의 당위성을 강변하며 “나는 선택된 자(chosen one)”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을 때 내뱉는 서글픈 밈으로 통한 지 오래이지만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그에게는 의미가 다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선택받은 자’로 여기는 듯하다. 2024년 7월 총격 암살 위기를 넘긴 것조차 ‘자신을 지키려 신이 개입한 증거’라는 식이다.‘선택된 자’를 자처하는 트럼프의 광기가 종교적 금도를 넘었다. 그는 지난 12일 밤(현지시간) 트루스소셜에 흰옷에 붉은...

    2026.04.14 18:38

  • [여적]기억의 수호자
    [여적]기억의 수호자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국가폭력이 훼손한 인간의 존엄과 그들의 희생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가 곳곳에 담겨 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문장은 죽은 자의 영혼과 남겨진 자의 고통을 연결하려 한 작가의 몸부림이다. 소설의 마지막 “당신이 나를 꽃이 핀 곳으로 끌고 가주길 바란다”는 대목은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이 더는 외롭지 않도록 살아남은 이들이 기억해달라는 주인공 동호의 독백이자 작가의 호소였다. 제대로 기리고 기억되지 못한 참사의 고통은 남은 이들의 삶까지 잠식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강은 세월호 참사가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결정적 계기라고 했다. 세월호는 그에게 ‘끝나지 않은’ 광주였기 때문이리라.세월호 참사 이후 열두 번째 맞는 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누군가는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차가운 팽목항 어귀에서 발을 ...

    2026.04.13 17:50

  • [여적] ‘까치밥’ 선거
    [여적] ‘까치밥’ 선거

    엄마는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마당 한 귀퉁이의 감나무가 떠오른다고 했다. 장대로 떨군 붉고 단단한 대봉을 바구니에 담아 이웃과 나누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 시절, 감 배달 심부름을 할 때면 왜 꼭대기의 감은 안 따고 남겨둔 건지 궁금했다.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린 그 홍시는 날짐승의 겨울 양식인 ‘까치밥’이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펄 벅은 1960년대 경북 경주의 한 농촌 마을에서 본 까치밥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극찬했다. 인간의 욕심을 덜어낸 자리에 공존과 배려를 채워 넣는 것, 그게 바로 까치밥 정신이다.정치권에도 까치밥의 미학이 피어난 때가 있었다. 2016년 총선에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구에서,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가 전남 순천에서 당선된 사례는 ‘까치밥 선거’로 회자된다. 한 정당의 싹쓸이 대신 상대 진영의 숨구멍을 열어준 영호남 민심을, 겨울새를 위해 홍시를 남긴 농부의 배려에 빗댄 것이다. 당시 험지에서 피어난 김부...

    2026.04.12 18:38

  • [여적] 미국 수정헌법 25조
    [여적] 미국 수정헌법 25조

    미국의 헌법에는 대통령을 강제로 끌어내릴 수 있는 ‘비상 해임’ 조항이 들어 있다.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될 경우, 부통령과 내각 과반수가 동의해 의회에 서한을 보냄으로써 대통령 권한을 정지할 수 있도록 한 ‘수정헌법 제25조’다.1967년 이 조항이 제정된 배경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1963년)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잔여 임기를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마저 심장질환을 겪으며 권력 공백 위험이 커지자 도입됐다. 미국 정부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수정헌법 25조는 4개 항으로 구성돼 있다. 앞 부분 3개 항은 대통령의 사망·사임, 부통령 궐위와 승계 등에 대한 내용이다. 대통령 동의 없는 강제 해임은 마지막 4항에 규정돼 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 마디 한 마디에 82억 인류가 경악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중이다. 마침내 이란의 “문명을 말살”하겠다는 망언에 이르자, 미국 내에서 수...

    2026.04.09 19:37

  • [여적]올레길에서 행복하라
    [여적]올레길에서 행복하라

    대부분의 도보 여행기는 깨달음으로 충만하다. 여행에선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마련이니 실패를 통해 겸손해지는 경우가 많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종주’ 실패담일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브라이슨이 미국으로 돌아와 애팔래치아 트레일(AT) 종주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렸다. 1996년 길을 떠난 브라이슨은 3360㎞에 달하는 코스를 완주하진 못했다. 하지만 완주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린 시도했다”는 그의 말처럼 도전만으로도 의미 있다.그로부터 10년 후인 2006년 9월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언론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했다. 일중독에 빠져 있다 ‘번아웃’된 상태였다. 800㎞ 순례길을 완주하며 위안과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듬해 ‘고향 제주에 길을 내겠다’며 귀향했다. 제주 올레길의 시작이었다. 세상은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이들 때문에 ...

    2026.04.08 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