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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민원사주 공익신고자들의 ‘용기’
1992년 3월 14대 총선을 앞두고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 이지문 중위는 서울 종로구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운동권 출신도 아니고 데모 한 번 안 한 그였지만, 부재자 투표에서 무조건 1번을 찍게 하고 그러지 않으면 투표용지를 빼앗거나 불이익을 주라는 상부의 노골적 지시를 따를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그의 용기 덕에 군 부재자투표가 영외 투표로 바뀌며 부정선거를 차단하는 발판이 마련됐다. 정작 그는 헌병 조사와 영창생활을 하다 그해 5월 이등병으로 파면됐고, 삼성그룹 사전 채용이 취소된 후 직장도 구할 수 없었다. 평범한 시민이 경험하고 목도한 권력의 부정·비리를 폭로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고발한다’란 공개선언문으로, 120년 전 프랑스에서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 간첩 조작 사건을 비판한 대문호 에밀 졸라마저 투옥과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내부고발자나 공익제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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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잎 두 장에 배추 한 포기
‘신용카드보다는 체크카드, 그보다는 현금’이라는 재테크법이 있다. 신용카드는 당장 돈이 나가지 않아 충동구매를 부추길 수 있지만, 통장 잔액 한도에서 결제하는 체크카드는 그걸 막아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지 않으려면 현금만 한 게 없다. 지갑에서 5만원권 지폐를 빼는 느낌과 카드명세서에 서명하는 느낌은 엄연히 다르다.지금이야 2009년 6월23일부터 신사임당을 넣어 발행된 5만원권이 ‘대세 화폐’지만, 2010년대 중반까지는 세종대왕이 그려진 1만원 지폐가 가장 많이 쓰였다. 초록색 바탕이어서 ‘배춧잎’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붉은색 계열 1000원권은 단풍잎이었다. 지갑이 얇은 서민들은 세뱃돈이나 경조사비로 배춧잎을 몇 장 넣을지 많은 고민을 했다.배추 한 포기에 1만원을 넘어선 2010년 당시 ‘배추=만원 사실로’라는 기사가 등장하고, 신종 화폐로 배추 사진을 올리는 패러디가 유행했다. 고물가의 민심은 성났다. 당시 ‘MB 청와대’는 식탁에 양배추 김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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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50주년
‘민주화운동의 산증인’ 김정남이 두 권으로 정리한 <이 사람을 보라>는 한국 민주화운동사를 기록한 인물 열전이다. 김수환 추기경을 시작으로 49명이 소개되고, 단체는 유일하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등장한다.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결성됐다. 그해 9월26일 명동성당에서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는다”로 시작하는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행동하는 신앙의 양심’이 되려고 나선 사제단의 발걸음은 권위주의 시대 고비마다 ‘암흑 속의 횃불’이었다. 폭동이라고 거짓 선전되던 5·18민주화운동 실상을 앞장서 알렸다. 1987년 5월17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이 조작됐다’는 폭로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었다. 사제단은 2007년 10월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기 위해 찾아온 김용철 변호사를 맞이했다. 이 일은 경제민주화 문제를 환기시켰다. 사제단은 생명의 가치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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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의 50호 홈런공
1961년 뉴욕양키스 로저 매리스가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고 역사적인 61호 홈런을 날렸을 때, 얼떨결에 그 공을 잡은 행운아는 19세의 살 듀란테였다. 입장권조차 여자친구가 대신 사줘야 했던 가난한 그 청년은 대기록을 세운 매리스에게 공을 돌려주려 했다. 스스로는 그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그 마음이 고마웠던 것인지, 매리스는 공을 받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꼬마야, 그 공을 경매에 내놓으렴. 그러면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처럼 공은 캘리포니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샘 고든이 5000달러에 샀다. 지금 시세로 치면 약 6700만원에 해당한다. 그리고 고든은 몇년 후 매리스에게 그 공을 대가 없이 돌려줬다. 선수도, 팬도 서로 양보하려 했던 매리스의 61호 홈런공은 결국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전시돼 아름다운 미담을 완성했다.지금 와서 보면 참 믿기 힘든 동화 같은 얘기다. 메이저리그 인기와 규모에 비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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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먹는 이민자’는 어떻게 시작됐나
미국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는 <힐빌리의 노래>를 쓴 공화당 부통령 후보 J D 밴스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다. 한때 ‘작은 시카고’라 불릴 만큼 번성했던 이 도시는 다른 러스트벨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조업이 무너져 사람들이 떠나가고, 많은 집과 건물은 폐가가 됐다.다행히 도시는 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 덕에 2017년부터 전환점을 맞았다. 일본 자동차부품 공장 유치를 필두로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계속된 인구 유출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었는데,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아이티 이민자다. 최근 몇년 새 스프링필드로 몰려온 아이티 이민자는 1만5000여명에 달한다.경제는 활력을 찾았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급격한 인구 증가로 집값이 치솟고, 학교와 병원 등이 부족해졌다. 수면 아래 부글부글 끓던 불만이 터져나온 계기는 교통사고였다. 지난해 아이티 이민자가 몰던 차량이 스쿨버스와 충돌해 11세 소년이 사망했다. 일부 사람들은 “아이티 이민자가 어린이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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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이 서러운 농심
들판마다 곡식 익는 소리가 들린다. 풍부한 일조량과 고온 덕에 벼 이삭이 유달리 더 통통해 보인다. 태풍이 막판 변수지만 이변이 없는 한 대풍이 예상된다. 사과와 배도 올해는 작황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농민들 얼굴엔 수심만 가득하다. 자식처럼 키운 벼를 트랙터로 갈아엎는 사례가 속출한다. 추석을 겨냥해 재배한 조생종 벼 가격이 지난해보다 20% 가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음달 중·만생종이 쏟아지면 쌀값은 더 떨어질 것이다. 역대 최대 폭락을 기록한 2022년보다 더 낮을 것이라는 전망이다.정부가 지난 10일 쌀값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햅쌀 10만t을 시장에서 격리해 사료로 쓰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가축에게 햅쌀을 먹이다니, 전대미문의 정책이다. 오죽하면 이런 정책까지 낼까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동물도 양질의 사료를 먹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 쌀 한 톨이 귀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시골 농협 창고마다 가득 쌓여 있는 묵은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