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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적]어느 이태원 상인의 죽음
    [여적]어느 이태원 상인의 죽음

    2022년 10월29일 당시 33세 A씨는 이태원 해밀톤호텔 부근에서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태원은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와 방역 지침이 완화된 이후 처음 맞는 핼러윈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순식간이었다. 인파에 밀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A씨는 가게를 뛰쳐나와 쓰러진 사람들을 옮겼다. 159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 이후 이태원 상권에 인적이 끊기자 A씨는 1년 뒤 주점을 닫고 다른 가게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무엇보다 그날의 충격과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 A씨는 지난 19일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끊어졌고 29일 숨진 채 발견됐다.사회적 참사는 생존자와 유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피해자들은 그날의 기억이 갈수록 뚜렷해진다고 한다. 내 잘못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지 가슴속 응어리를 부여안고 버틸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생존자들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2026.04.30 18:03

  • [여적] ‘예스 민즈 예스’
    [여적] ‘예스 민즈 예스’

    2024년 프랑스 사회는 남편이 건넨 약물로 의식을 잃고 50명의 남성에게 9년간 성폭행을 당한 사건에 경악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아 동의한 줄 알았다”고 항변했지만, 피해자인 지젤 펠리코는 “부끄러움은 가해자들 몫”이라며 이들을 법정에 세웠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의회는 폭력·협박이 있어야만 인정되던 강간죄를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으로 규정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피해자의 저항’이라는 낡은 신화를 거부한 사례는 스페인에도 있다. 2016년 한 축제에서 18세 여성을 남성 5명이 집단 성폭행한 ‘울프팩(늑대 무리)’ 사건이다. 1심 재판부가 “피해자가 항거 불가능할 정도의 폭력이 없었다”며 강간죄 대신 성적 학대죄를 적용하자 분노한 민심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강간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성관계 시 명시적 동의가 없으면 강간으로 간주하는 ‘성적 동의에 관한 포괄적 법률’ 제정(2022년)의 동력이 됐다....

    2026.04.29 18:03

  • [여적] 지정생존자
    [여적] 지정생존자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는 테러로 미 대통령과 대통령직 승계 서열 상위 인사들이 모두 숨지자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이 백악관 주인이 되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승계 서열 13위 커크먼이 대통령직에 오른 것은 대통령 국정연설 당시 ‘지정생존자’여서 참변을 피했기 때문이다.지정생존자란, 미국에서 국가 최고위층이 모일 때 권력 승계 서열에 있는 각료급 한 명을 제외해 안전한 곳에 두는 제도다. 수뇌부가 한꺼번에 유고되더라도 정부 기능이 마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지정생존자는 행사 직전 비밀리에 군부대 등으로 이동한다. 대통령급 경호가 이뤄지며 ‘뉴클리어 풋볼’(Nuclear football)로 불리는 ‘핵가방’을 든 참모도 따라붙는다.이 드라마는 국내에서도 <60일, 지정생존자>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국회의사당이 폭탄 테러로 무너지고 대통령이 사망한 뒤 국무위원 중 ...

    2026.04.28 18:10

  • [여적]미국의 ‘차가운 내전’
    [여적]미국의 ‘차가운 내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산층의 나라’였다. 대다수 시민이 임금으로, 퇴직 후 연금으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중산층 비율은 60%가 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세계화가 본격화하면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각한 나라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비백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는 백인 보수층의 박탈감과 분노를 자극해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트럼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 트럼프 지지층도 마찬가지다. 2021년 1월6일 트럼프의 대선 불복을 옹호하는 시위대의 연방의사당 폭력 점거 사태는 미국 민주주의 체제에 빨간불이 켜졌음을 드러냈다. 지난해 트럼프가 재집권한 후 정치·사회적 갈등은 더 커졌다. 지난 1월 이민세관집행국(ICE) 요원이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이민 단속에 반대하는 여성 시민을 총으로 쏴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바버라 월터는 저서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2026.04.27 18:26

  • [여적]피해자 연대가 이끈 전세사기법
    [여적]피해자 연대가 이끈 전세사기법

    소설가 김훈은 2019년 10월 ‘생명안전 시민이야기 마당’에서 “집에 누워 있으면 사람들 몸 터지는 소리가 매일매일 들린다”고 말했다. 매년 2000명가량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돈이 많고 권세가 높은 집 도련님들이 산재로 죽었다면 이 문제는 진즉 해결됐다”고 했다. 하지만 “산재 현장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교육을 잘 못 받고, 말하자면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다.돈도 없고 ‘빽’도 없는 노동자들이 ‘여의도 정치’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좁은 길은 연대와 싸움이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의 역사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투쟁의 역사다.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끼여 죽거나 병들어 죽은 노동자의 동료, 노조,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이 연대해 싸웠기 때문에 산안법은 이윤보다 생명에 무게중심을 두는 방향으로 개정됐다.지난 23일 전세사기 특별법(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 특별법) 개정안...

    2026.04.26 19:16

  • [여적]월드컵으로 번진 미·이란 전쟁
    [여적]월드컵으로 번진 미·이란 전쟁

    축구의 기원을 둘러싼 여러 설 중 유력한 것이 고대 그리스의 하패스톤(상대진영 구역으로 공을 가져가면 득점하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기가 침략자 로마인들을 거쳐 영국에 들어왔고, 11세기 덴마크가 영국을 점령했다가 물러난 뒤 영국인들이 덴마크인들의 두개골로 하패스톤을 하면서 울분을 푼 것이 근대 축구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역사적 앙금이 있거나 갈등 중인 국가들 간 축구 대항전은 민족주의적 정서를 끌어올리고 사람들 마음을 격동시키기 쉬운데, 그건 축구에 각인된 이런 정치적 유전자와 무관치 않을지 모른다.축구와 전쟁에 얽힌 일화들도 있다. 1982년, 아르헨티나가 영국령인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해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참패로 끝났다. 하필 아르헨티나·벨기에의 스페인 월드컵 개막전이 열린 날이 아르헨티나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이었다. 전 대회 우승팀인 아르헨티나는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2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다.그로부...

    2026.04.23 18:10

  • [여적]사북의 얼어붙은 봄
    [여적]사북의 얼어붙은 봄

    강원 정선군 사북읍엔 2004년 가동을 멈춘 동원탄좌가 있다. 1960년 흥국탄광으로 출발한 이곳은 1970년대 후반 국내 최대 민영탄광으로 성장하며 한국 산업화의 동력 역할을 수행했다. 한때 24갱도에서 수백만t의 석탄을 뿜어냈던 동원탄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거론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산업유산의 화려한 명성 뒤엔 광산 노동자들에 대한 잔혹한 국가폭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진 1980년 4월, 사북에선 광부들과 가족 등 5000명이 참가한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다. 매년 200명이 막장에서 죽는 지옥 같은 노동환경, 저임금과 어용노조의 횡포에 분노한 광부들의 총파업이 나흘간 이어졌다. 노사합의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그 뒤 진짜 비극이 시작됐다. 전두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광부와 그 가족 200여명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며 빨갱이와 폭도의 굴레를 씌운 것이다. 살아 돌아온 이들조차...

    2026.04.22 18:41

  • [여적] 보편적 시청권
    [여적] 보편적 시청권

    ‘국민영웅’은 늘 TV 속에서 걸어나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사상 첫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박지성이 그랬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손흥민이 찔러준 공을 감각적인 슛으로 연결해 포르투갈 골망을 갈랐던 황희찬이 그랬다. 골을 넣은 후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던 박지성, 상의 탈의 후 ‘알통 세리머니’를 펼친 황희찬을 많은 이들이 떠올릴 것이다.올림픽과 월드컵은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이벤트다. 시민은 같은 시간, 같은 화면을 보며 같이 울고 웃는다. 구성원들이 공유한 경험은 공동체의 기억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 시대적 서사로 자리 잡는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보편적 시청권’ 덕분이다.방송법이 규정한 보편적 시청권은, 국민적 관심이 큰 스포츠 경기나 주요 행사(국민관심행사)를 일반 국민이 시청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문제는 기존의 보편적 시청권이 지상파 방송 중심의 미디어 환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6.04.21 18:20

  • [여적]AI엔 없는 망설임
    [여적]AI엔 없는 망설임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좋은 이웃’에는 2020년 전후 아파트값 폭등 때 집을 사지 못해 세입자 신세인 40대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신혼 초 ‘우리 시작을 이웃과 함께하자’며 유니세프 정기 후원을 권했던 남편 호준은 요즘은 한강을 건너는 출근길 풍경이 다 돈으로 보인다고 아내 주희에게 말했다. 주희는 ‘그래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쥔 게 있는 세대잖아’라고 답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재택 독서지도사로 일하는 주희는 방문 학습지교사 시절 인연을 맺은 학생 시우를 여전히 가르치고 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시우는 서울 변두리 낡은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다. 하루는 수업 뒤 옆 동네에 새로 생긴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가게 됐다는 시우 어머니 말을 듣고 주희는 마음이 허전하고 휑해졌다. 이런 감정을 품은 스스로에 수치심을 느낀 주희는 얼마 전 남편이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곧바로 이런 질문이 머리를 채웠다. “그...

    2026.04.20 18:20

  • [여적] ‘98년생 김현진’
    [여적] ‘98년생 김현진’

    2016년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고 싸워왔던 김현진씨가 세상을 등졌다. 김씨의 변호를 맡았던 이은의 변호사는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짧았지만 빛나고 뜨거웠던 98년생 김현진님의 작별을 전한다”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알렸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과거를 잊고 살려 했으나 너무 힘에 부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2023년 11월 가해자인 시인 박진성씨가 실형을 선고받은 뒤 경향신문과 인터뷰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시인을 꿈꿨던 김씨는 시 강습으로 알게 된 박씨로부터 여러 차례 언어 성폭력을 당했다. 당시 김씨는 17세 고등학생이었다. “거리를 걸으며 손잡자” “애인 안 받아주면 자살한다”, 어린 학생에게 박씨가 보낸 메시지는 무도한 것이었다. 김씨는 문단 내 성폭력 미투 운동이 일어나던 2016년 10월 트위터에 ‘박씨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했다.박씨는 사실이 폭로되자 반성은커녕 ‘무고’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소셜미디어에 ...

    2026.04.19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