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적
탄핵 크리스마스
‘딸랑딸랑~’ 자선냄비에 돈도 넣었고, 송년 모임도 해치웠겠다, 지금쯤은 크리스마스에 눈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게다. 계엄의 밤이 없었다면 한 해를 이렇게 마무리했을 게다. 그 무도한 일이 있기 전까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에 한껏 들떠 그 순간을 두고두고 떠올릴 수 있으리라 싶었다. 그러나 계엄은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삼켜버렸다. 기부할 마음도 쪼그라들어 ‘사랑의 온도탑’은 100도를 달성하지 못할 거라고 한다. 송년회는 줄줄이 취소됐다.그나마 안심되는 것이 있다면, 같은 마음으로 거리를 채우고 있는 응원봉들이다. 내란 수괴 윤석열을 끌어내려는 형형색색의 불빛은 국회의 탄핵소추 결정을 끌어냈다. 12·3 계엄 후 이어지는 집회는 2030 여성들이 주축이다. 수많은 콘서트에서 단련된 노하우로 혹한의 날씨에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멋지고 대단하다.그 와중에도 나라는 뒤로 가고 있다. 탄핵을 반대하는 극우세력 압박으로 경북 구미시가 25일로 예정된 가수 이승환씨의 ... -
여적
남태령 대첩
1894년 12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가는 길이 가로막혔다. 공주 우금치라는 고개였다.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의 화력에 맞서기에 중과부적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눈밭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그로부터 꼭 130년이 흐른 지난 21일 밤,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조직한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30여대와 화물차 50여대가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곳은 서울 남쪽의 남태령이라는 고개였다. 농민들은 양곡관리법이 이 정부하에서 두 번이나 거부된 농업 홀대에 항의하고 ‘내란 수괴 윤석열 체포’를 촉구했다. 경찰은 ‘서울 교통에 혼란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대통령의 거짓 출근차량에 협조하며 출근길 교통 체증을 유발한 공범인 경찰이 할 말은 아니었다. 경찰은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도 똑같이 행동했다. 농기계를 몰고 상경하려던 농민들은 그때도 서울 진입... -
여적
모두의 1층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1984년 9월19일, 장애인 김순석씨가 ‘거리의 턱을 없애달라’는 유서를 염보현 서울시장에게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40년이나 지났지만 턱은 없어지지 않았다.1998년 4월 만들어진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은 식당, 카페, 편의점에 경사로 등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 시행령은 편의점 등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300㎡(90평) 이상에만 의무화했다. 2019년 기준으로는 전국 편의점의 3%만 법 적용 대상인 것이다. 정부는 2022년 4월에야 바닥면적 조건을 50㎡로 강화했다.이에 장애인 김모씨 등 3명은 2018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재판부는 위법적 시행령이라면서도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
여적
북한 군인의 얼굴
저 멀리 아래, 허허벌판 눈밭 위를 달리는 북한 군인들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다. 일렬로 늘어선 점처럼 보이던 형상은 순식간에 눈·코·입의 형체를 갖춘 사람으로 바뀌고, 화면은 목표물 사살 직전 다른 장면으로 전환된다. 화면이 다시 시작된다. 광활한 눈밭 위를 또 다른 무리의 북한 군인들이 달리고 있다. 드론이 한 명씩 정조준하기 시작한다. 북한군은 흩어져 달아나지만 드론이 계속 쫓아오자 겁먹은 표정으로 뒤돌아본다.우크라이나 특수작전군은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 파병된 북한군을 드론으로 공격하는 영상을 지난 17일(현지시간) 공개했다. 드론에 설치된 카메라가 실시간 전송한 영상은 흡사 게임 장면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당시 드론을 조종했던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워싱턴포스트에 “마치 이지 모드(easy mode)로 컴퓨터 시뮬레이터를 플레이하는 것 같았다. 기괴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그만큼 북한군이 겨누기 쉬운 목표물이었단 뜻이다. 러시아군은 드론 공격을 피하기 위... -
여적
칩플레이션
서울 신문로 한 대형 교회 앞 길가엔 조그마한 노점 호떡집이 있다. 얼마 전 이 집 할머니에게 들은 얘기다. 밀가루가 많이 들어간 호떡 반죽 10㎏을 3만3000원에 받아다 호떡 한 개에 1500원에 팔았다. 그러다 찹쌀과 흑미가 들어간 고급 반죽으로 바꿨더니 납품받는 가격이 5㎏에 3만원이 됐다. 호떡값을 2000원으로 올렸지만 한 달 정도 지나 다른 집이 호떡값을 1500원으로 내려 할머니도 같이 내렸다. 그새 반죽 가격은 3만1000원이 됐다. 원재료값은 두 배 올랐는데 500원만 올려도 손님이 준다는 것이다. 팔아도 남는 게 없으니 장사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이었다.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물가 상승 고통을 더 크게 겪는다는 실증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한국은행이 가공식품의 가격별 물가지수를 분석해 18일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코로나 팬데믹 후 국내에서 저가 상품 가격이 고가 상품보다 3배가량 더 올라 ‘칩플레이션’(cheapflation) 현상이 심해... -
여적
연말 송년회를 하세요
연말인데 연말 같지가 않다. 사람들은 송년 모임이 한창이어야 할 식당과 술집 대신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들었고,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탄핵하라” 구호가 울려퍼졌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한 해를 돌아봐야 할 시기에 사람들은 때아닌 나라 걱정으로 잠 못 이뤘다.“계엄 사태 이후 취소된 예약만 40건이 넘습니다. 지난해 이맘때는 객실 예약이 전체 다 마감됐는데, 지금은 평일 기준 객실률이 50%밖에 안 돼요. 오늘도 예약이 2건이나 취소됐어요.” 전북 무주의 한 숙박업체 사장이 지난 11일 중소기업중앙회 긴급 실태조사에서 한 말이다. 세종시에서 음식점을 하는 자영업자도 “8명이 예약하면 5~6명은 예약을 취소하고 2~3명만 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지난 12일 발표된 소상공인연합회 조사에서도 10명 중 아홉은 계엄 사태로 매출이 줄었다고 답했다. 반토막 난 곳도 40%에 육박한다고 한다. 대통령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이 몰고 온 ‘연말 비수(༣... -
여적
한동훈의 ‘5개월 정치’
국민의힘 대표 한동훈은 대통령 윤석열과의 관계 속에서 주목받아왔다. 검찰에선 윤석열의 오른팔이었고, 윤석열 정부에선 초대 법무장관에 발탁된 ‘황태자’였다. 정치 데뷔도 지난해 12월 총선을 앞두고 여당 비대위원장으로 화려하게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기회가 될 때마다 한 대표를 ‘꽃마차’에 태워줬다. 하지만 한 대표가 김건희 여사 문제를 지적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틀어졌다.한동훈이 7·23 전당대회에서 압승한 배경에는 윤석열이 있었다. 친윤이 한동훈을 ‘배신자’라고 공격했지만, 윤석열 부부에 실망한 당원과 변화를 바라는 지지층은 그를 원했다. 미래권력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표이자 차기 대선주자로서 윤석열과의 완전한 차별화를 해내지 못했고, 민심에도 순응하지 않았다. 주요 국면마다 결기·소신·정치력 부족을 드러냈고, 소통과 설득 능력에 의문을 갖는 이들도 적지 않다.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약속 불이행은 그렇게 오락가락한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한동훈은 12·3 불... -
여적
‘2030 여성’의 힘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색깔로 목소리를 내는 오색 빛깔 응원봉이 마치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나요?” 좋아하는 K팝 가수의 팬클럽 응원봉을 들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한 30대 여성이 한 말이다.이번 탄핵 집회의 가장 큰 주역은 단연 2030 여성들이다. 가요 시상식 방청권을 얻기 위해 혹한기 노숙도 불사하고, 다른 팬들과 핫팩과 간식을 나누던 이들의 ‘덕질’ 문화가 한겨울 거리 집회에서 빛을 발했다. K팝 산업의 확장을 이끈 원동력이지만, ‘빠순이’로 불리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이들의 열정과 조직력이 정치 집회에 새로운 문화적 활기를 불어넣었다.정치적 주체가 된 2030 여성의 힘은 참석자 수치로도 확인된다. 경향신문이 서울시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난 7일 여의도 집회 참가자를 성별·연령대별로 분석한 결과, 20대 여성 비율이 18.9%로 가장 높았다. 이어 50대 남성(13.6%), 30대 여성(10.8%) 순이었다. 전체 참여자 10명 중 3... -
여적
광화문 집회 VS 여의도 집회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1953년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퇴임하며 국민에게 전한 고별 연설 내용 중 일부다. 트루먼 대통령은 집무실 책상에 항상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문구가 새겨진 명패를 뒀다고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 때 이 명패를 윤석열에게 선물했다. 이 명패를 자랑하던 윤석열은 명패에 쓰인 경구는 새기지 않았다. 취임 후 국정혼란에 ‘나 몰라라’ 했던 사례는 열거하기에 입이 아플 만큼 많다. 그러나 계엄 선포로 혼란을 자초하고도 ‘야당의 폭거’ 때문이라는 지난 12일의 담화문은 한계를 뛰어넘었다.계엄이 선포된 3일 밤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의 망상은 현실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시민들은 다시 광장으로 모였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광화문이 아니라 국회 앞이 무대라는 점이다. 시민들이 광화문으로 모인 건... -
여적
부정선거 음모론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와 맞서 싸운다면, 우리는 더 나은 세상으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지난 10일 뉴욕타임스에 보낸 고별 칼럼에서 한 말이다.카키스토크라시는 ‘최악’이란 뜻의 그리스 단어 ‘kakistos’와 ‘권력·통치’를 뜻하는 ‘cracy’의 합성어다. 문자 그대로 가장 자격 없고, 최악인 사람들이 운영하는 정부란 뜻이다.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는 이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귀환으로 미국인 절반과 전 세계 대부분 사람들이 느낀 두려움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단어”라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아마 그 두려움은 12일 대통령 윤석열의 대국민 담화를 지켜본 한국 시민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선거 관리 전산시스템이 이렇게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들이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있나”라며 “선관위는 강제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