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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이번에는 할배! 왜?
할매 얘기나 할 때가 아니다(젠장. 머릿속으로 다 써놨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오래(오래는 아니다. 고작 12월3일 밤 10시59분부터 현재까지. 그런데 무지막지하게 길게 느껴졌다. 한 45년쯤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고민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도 얼척이 없응게 헐 말이 없네이.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우리 집 손님을 태우러 오신 기사님께서 한마디 보탰다. 먼 일이대요? 취했응게 그랬겄지라? 순간 생각했다. 이번에는 할배 이야기나 해야겠다.어떤 할배가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소학교도 마치지 못한. 그래서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던.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늘 친절하게 인사를 받아주었고 때로는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으며, 코 찔찔 흘리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세워 따신 갱엿을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집안에서는, 폭군이었다. 할배는 타고나기를 청결한 사람이었다. 옷에 붙은 작은 티끌 하... -
루페로 보는 시선
선택된 피사체, 결국 진실의 일부일 뿐
2024년 12월3일은 여러모로 역사에 남을 날이다. 대통령의 긴급 담화 이후 45년 만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눈이 조금만 와도 울리던 재난문자는 잠잠했다. 갑자기 선포된 계엄령은 국회의원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6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시작도 끝도 지독하게 급작스러웠다.3일 저녁,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왓츠앱 메신저가 계속 울렸다.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울리는 진동에 메신저를 켜 내용을 확인해보니 영국과 미국 친구들이 나의 안전을 묻고 있었다. 어리둥절해서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 계엄령이 발표되었다는 기사가 속보로 뜨고 있었다. 현지시간으로 한낮에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친구들이 BBC와 CNN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에 놀라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나중에 유튜브로 해외 보도를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국회 앞 풍경만 보도되다 보니 전쟁이라도 난 듯 무섭고 위험해 보였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국회를 포위하고 있고 시민들이 국회 주변을 둘러싸고... -
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그래도 소는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방송되던 12월3일 늦은 밤, 나는 이 칼럼을 쓰는 중이었다. 내용은 국회의 예산권을 따져보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예산 확정 기한인 12월2일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예산을 두고 여야가 대치 중이었기 때문이다. 법정 기일 내 예산 통과가 안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참에 작정하고 국회의 예산 심의 행태를 질타하면서 개선안을 제안하려 했다. 한창 글 쓰는 중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화급한 목소리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뉴스가 떴다고 했다. 나는 가짜뉴스일 것이라고 답했다. 아내는 아니라고 반박했고, 나는 급히 인터넷을 켰다. 사실임에 경악했고, 바로 TV를 켜고 상황을 주시했다.12월4일 새벽 1시경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었을 때는, 안도감을 넘어서서 환희의 감정마저 느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가결을 선포하면서 “국회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임을 확인했다. 국민과 함께 ... -
사설
무슨 일 저지를지 모를 ‘시한폭탄’ 윤석열, 놔둬선 안 된다
12·3 친위 쿠데타에 실패한 대통령 윤석열이 이튿날 여당 지도부를 만나서 했다는 말이 가관이다. “야당에 경고하려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는 취지였다. 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막지 않았고, 국회의 계엄령 해제 결의도 수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후안무치한 변명이다.국회 출입을 막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계엄사령부가 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통제한 것을 국민 대다수가 목격했고 그 증거도 차고 넘친다. 국회의장은 국회 담을 넘어 들어가야 했고, 한 의원이 경찰과 실랑이를 했지만 결국 국회에 못 들어갔다. 계엄군이 국회의장, 정당 대표 등 10여명의 체포명단을 만들고 실행하려고 움직인 상황이 국회 CCTV에 기록돼 있다. 윤석열 자신도 여당 대표가 “왜 나를 체포하려고 했느냐”고 묻자 “정치활동 금지라는 계엄 포고령 위반 때문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대통령이 김용현 국방장관을 문책 해임하지 않고 사의를 수용한 것도 대통령 자신에게 내란죄 최종 책임이 있음을 인정... -
여적
비겁한 국무위원들
‘관료는 영혼이 없다’는 말이 있다. 100여년 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한 말인데, 관료는 ‘정치’가 아닌 ‘행정’을 하는 집단이란 의미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충실하게 일하는 것이 관료의 본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표현이 한국으로 와선 정권 입맛에 맞춰 일하는 관료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그러나 잘못된 권력의 지시에도 무조건 따른다면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게 된다.지난 3일 밤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전 법적 절차인 국무회의를 열었다. 문제는 국무회의가 정상적으로 열렸는가이다. 국무회의는 국무위원 과반 출석, 출석 위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안건을 의결하지만, 계엄법은 의결이 아닌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국무회의가 개의하려면 대통령을 포함, 21명의 국무위원 중 최소 11명은 참석해야 한다. 현재 면직된 전 국방부 장관 김용현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 약 절반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6명은 참석 여부 확인을 ... -
사설
국민 적으로 돌린 계엄 실행 총책 김용현, 내란죄로 체포해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내란죄 고발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가 5일 김 전 장관을 출국금지했다. 심우정 검찰총장이 내란죄에 대한 검찰의 직접 수사가 가능하다며 출국금지를 지시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군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돌린 위헌·위법적 비상계엄 선포를 대통령 윤석열에게 건의하고 실행한 당사자다. 검찰이 그의 출국을 금지한 건 윤석열의 내란죄 혐의를 수사하기 위해 당연히 선제적으로 취해야 할 조치이다.김 전 장관이 비상계엄 실행을 주도한 정황은 차고 넘친다. 김선호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차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누가 국회에 계엄군 투입을 지시했느냐’는 질의에 “김 전 장관이 했다”고 했다. 계엄사령관이었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자신은 계엄군의 국회 진입 계획도 몰랐다고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투입돼 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막고,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등의 체포를 시도한 것은 헌법 77조5항에 정면으로 반한다. 그 작전을 김 전 장관이 예하... -
사설
한동훈과 국민의힘은 역사의 죄인이 되려는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5일 국회의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지난 밤 대통령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헌법과 민주적 질서를 파괴한 대통령을 여당이라고 해서 감싸고 지키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과 사익을 위해 국가 변란을 꾀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국가 정체성과 민주주의의 보루가 돼야 할 입법부의 책무를 저버린 행태 아닌가. 한 대표와 국민의힘은 진정 역사의 죄인이 되려는 것인가.한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탄핵 반대에 동의하면서도 “대통령의 위헌적 계엄을 옹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관련자들은 엄정하게 책임져야 한다”고도 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통령 자격을 잃었으면 스스로 물러나거나 탄핵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한 대표가 여당 내 소수파로 지지층에 ‘배신자’로 찍힐까 우려하는 처지는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 -
플랫
미완의 1980, 밝혀야 할 2024
정부 수립 이래 가장 길었던 계엄은 1979년 10월27일부터 440일간 지속된 비상계엄이다. 신군부 세력의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계엄은 5·18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과거처럼 보였던 ‘역사’가 ‘현실’로 들어온 것은 지난 4월 44년 만에 5·18 당시 계엄군 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를 취재하면서다. 여전히 일상에서 계엄의 시대를 지우지 못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계엄군 여럿에게 강간을 당한 피해자는 아직도 계엄군이 입고 있던 얼룩무늬 군복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그때 맡았던 술 냄새, 땀 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맡으면 구토한다고 했다.1981년 해제됐던 계엄령이 2024년 다시 선포됐다. 스웨덴에서 열릴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을 일주일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은 광주의 상처를 들춰냈고 ‘친위쿠데타’나 다름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 했다.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한 계엄군에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 -
정동칼럼
베이비부머의 국민연금 졸업
다음주면 2024년 정기국회가 문을 닫을 예정이다. 이와 함께 올해 연금개혁도 물 건너간다. 지난 9월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발표한 후 국회에서 논의가 본격 이어질 줄 알았으나 헛된 기대였다. 정부 개혁안이 구체적이고 여러 논점을 제시한 만큼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를 보완하고,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은 대안을 제시하며 서로 이견을 좁혀가야 하건만, 실질적 논의는 없이 연금개혁위원회를 어떻게 꾸릴지에 대해 공방만 벌이다 또 한 해를 허탕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미래 재정이 불안정한 국민연금을 두고서 이토록 안이할 수 있다니. 사실 이번 22대 국회만이 아니다. 소득대체율을 낮추었던, 국민연금의 마지막 개혁이 노무현 정부 2007년에 있었으니, 정치권은 지난 17년 동안 국민연금 개혁을 방치해 왔다.국민연금 개혁 의제는 보장성과 지속가능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보장성 개혁은 대체적으로 방향이 잡혀 있다. 국가의 지급보장, 연금크레딧 확대, ... -
문화와 삶
주디스 버틀러의 초현실적 한국 방문기
12월3일 새벽, 인천공항 6번 게이트 앞.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그마한 사람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게 해서 미안해요. 수고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는 악수를 청하고는 내 차 뒷자리에 올라탔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버틀러 교수가 내 차에 타고 있단 사실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그가 ‘빅네임’이라서가 아니었다. 10여년 전 <젠더트러블>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과 흥분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에서 평생 느껴왔던 어떤 불편함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바로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이다.젠더 수행성이 뭘까? 누구는 이것이 세상을 망치는 ‘사탄 언어’라며 반발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다. 이렇게 한번 설명해 보자.대한민국에선 이제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 성별고지가 가능해진다. 12월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