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영경 기자

친일파 단죄·식민지 치욕 단절 좌절

1949년 6월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오전 8시30분, 윤기병 당시 서울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관 80여명이 반민특위 청사에 들이닥쳤다. 출근길의 반민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책상 위에 있던 친일파 관련 조사 서류들은 찢겨졌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부역자를 단죄함으로써 식민통치의 치욕스러운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반민특위의 노력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앞서 48년 4월8일 국회는 해방 이전 악질적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을 가결했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친일파 청산의 요구가 미군정의 회의적 태도로 이뤄지지 못하다가 3년 만에 실현된 것이다. 반민특위는 그해 10월23일 발족했다. 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 특별경찰대가 설치된 반민특위는 독자적으로 조사권·사법권·경찰권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모양새를 갖췄다.

[어제의 오늘]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

구성 초기 반민특위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경찰·검찰·군인 등 형사사법계 인물들을 필두로 정·관계, 종교·문화계 인물 등이 속속 검거되기 시작했다. 당시 반민특위에 체포된 인원은 총 688명이었고, 이 중 경찰 출신이 37%에 달했다. 이런 반민특위의 활동은 정부 요직에 두루 참여하고 있던 친일세력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특히 군과 경찰 등 사정기관에는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한 인사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친일 잔재세력의 거센 반발과 집요한 방해공작에 시달리게 된다. 반민특위 위원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이어졌고 49년 3월에는 진보적 소장파 의원 13명을 체포한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진다. 6월3일 군중 300~400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 최연 등 자신의 심복이던 경찰 간부들이 반민특위에 연이어 체포되자, 반민특위 해체를 추진해 6월6일 청사 습격을 지시한다. 이 대통령은 6월9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습격을 자신이 직접 지시했다고 밝힌다. 7월6일 공소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반민특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에 반대한 반민특위 위원장 및 구성원이 사임하면서 반민특위 활동은 무력화된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친일파 청산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됐다. 이영경 기자

<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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