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미국 FBI, 로버트 김 간첩혐의 체포

정진호 기자

“한국 상황 안타까워 정보 제공”

1996년 9월24일 미국 워싱턴DC 포트 마이어 미 육군 장교클럽에서는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부 주최로 ‘한국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리셉션이 한창이던 저녁 8시15분경 미연방수사국(FBI) 수사관 3명이 행사장에 들어섰다. 그들은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 백동일 대령(예비역 해군 대령·63)의 초청으로 파티에 참석한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을 미국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전격 체포한다.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71)은 8·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영 전 의원(1914~2004년)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민주당 김성곤 의원(3선·여수시 갑·59)의 큰형이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1978년부터 19년간 미 해군정보국 컴퓨터 분석관으로 일해 온 미 해군 문관이었다.

[어제의 오늘]1996년 미국 FBI, 로버트 김 간첩혐의 체포

FBI는 김씨가 미국 정부기밀을 백동일씨를 통해 한국정부에 넘겼다며 그를 간첩죄로 기소했다. 실제로 김씨는 백씨에게 약 10개월간 50여건의 정보를 제공했고, 그중 39건은 한국 정부에 보고됐다. 북한군의 동향 및 휴전선 배치 실태, 북한의 무기 수출입 현황 등 한국 정부 입장에선 유용한 정보였다. 체포되기 며칠 전까지도 강릉으로 침투 도중 좌초한 북한 잠수함의 이동경로를 백씨에게 알려줬다. 미국 측이 한국에 제공하지 않았던 정보였다.

김씨는 또 미 해군이 한국군에 수출하려던 해상지휘 통제(C4I)장비와 관련, 미국을 방문한 한국군 관계자들에게 ‘이 시스템이 한국실정에 잘 맞지 않으니 심사숙고할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김씨에게 간첩혐의를 씌웠다는 의혹이 있다. 또 당시 제네바협정 이후 북핵문제와 관련, 한국의 대북강경 대응 자제를 요청하던 미국이 한국을 통제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김씨와 백씨는 1995년 11월28일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해군 정보교류회의에서 처음 만났다. 백씨가 먼저 “북핵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미국은 북·미관계 개선에만 공을 들이고 있다”며 “첩보수집에 한계가 있어 북한군 동향을 잘 알지 못해 어려움이 많으니 기밀이 아니면 좀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김씨는 “한국의 대북 첩보여건이 그렇게 열악하냐”고 반문한 뒤 “돕겠다”고 한다. 우편이나 전화로, 때로는 만나서 정보를 전달하곤 했다. 그때마다 김씨는 백씨에게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김씨는 법정에서 “한국 측에 전달한 정보는 미국의 우방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에 불과하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FBI는 법정에서 김씨가 간첩이란 증거로 “난 한국인입니다. 나는 한국을 돕고 싶습니다. 염려마세요. 내 지위를 이용해서 한국을 도울 겁니다”라는 백씨와의 대화 도청 내용을 공개했다. 결국 김씨는 기밀 누설죄로 징역 9년에 보호감찰 3년형을 선고 받는다.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감형을 받아 7년간 복역한 뒤 2004년 출소, 보호감찰 중 사면되어 2005년 10월 자유인이 됐다.

김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집으로 돌아오다(2004·한길사)>에서 “미국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정보 공유체제에서 밀려나 있는 한국 상황이 안타까워 정보를 제공하게 됐다”고 말한다.

한국 외교와 관련, 최근 위키리크스에 폭로되는 사례들을 보면 한국의 고위 인사들이 마치 미국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국익을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란 점을 강조하지만 왠지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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