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Q한국판 초대 편집장 이충걸, 시력의 절반은 잃어도 '책 쓰는 베토벤'의 삶은 계속된다

장회정 기자
2018년 3월 ‘GQ’ 창간 17주년  기념호를 마지막으로 잡지계를 떠난 ‘초대 편집장’ 이충걸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며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사진 | 나승열

2018년 3월 ‘GQ’ 창간 17주년 기념호를 마지막으로 잡지계를 떠난 ‘초대 편집장’ 이충걸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며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사진 | 나승열

“나는 연대기가 무색할 만큼 오래 ‘GQ’를 만들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 잡지 시장이 다변화되면서, 외국 유명잡지가 한국판을 내고 이른바 라이선스 매거진 시대가 열리면서, 잡지기자를 에디터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스타 기자의 글을 읽기 위해 잡지를 사는 독자층이 생기면서부터, 그리고 종이잡지가 하나둘 자취를 감출 때까지, 이충걸(57)은 한국 잡지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이름이었다.

2018년 3월 ‘GQ’ 창간 17주년 기념호를 마지막으로 잡지계를 떠난 ‘초대 편집장’ 이충걸이 18년의 에디터스레터를 모은 책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은행나무)을 내놨다. 전화번호부에 맞먹는 긴 편지는 해를 넘기는 작업으로 500여페이지로 줄었다. 롤렉스 시계부터 와인, 밀라노 패션위크, 광화문광장, 우주까지 아우르는 광활한 주제부터 독서에 최적화된 종이 질, 표지를 채운 클로데트 스뢰더르스의 그림까지, 책은 “잡지는 문명이 남긴 수공업 예술의 마지막 형태”라고 말했던 저자의 모든 미감을 동원한 수공예품과 같았다.

지난 1월14일 서울 충무로의 한 경양식집에서 만난 이충걸은 어떻게 지내느냐는 인사에 “잘나가는 트로트 가수의 하루 같다”고 답했다. 책을 읽고, 쓰고 있으며 그가 대본을 쓴 ‘30년 지기’ 박정자의 연극 <박정자의 배우론-노래처럼 말해줘> 공연으로 보자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헤어드라이어에 감전돼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때로 고통스러웠던 마감 노동에서 놓여난 두 해 동안, 그는 격월간 소설·서평지 ‘악스트’에 중편 ‘지금은 고통이 편리해’를 발표했고 독서 커뮤니티 트레바리에서 4개의 클럽을 이끌고 있다. 회사 그만두면 하겠다고 별러왔던 일은 없다고 했지만 조직에서 벗어난 그의 양쪽 귀 뒤에는 전에 없던 도마뱀과 별 타투가 각각 새겨져 있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 500페이지가 넘는 책에 중복되는 표현이나 단어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단행본이나 짧은 기사에도 습관처럼 쓰는 표현이 나오게 마련인데.

“그걸 철저하게 잡았다. 여기서 썼던 비유가 저기서 나올 때도 있더라, 매우 드물지만. 적어도 한 칼럼 안에서는 부사도 똑같은 것이 없도록 했다. 약간 베 짜는 할머니 같았달까.”

- 책 제목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에는 어떤 뜻을 담았나.

“일단 ‘이건 내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없을 걸. 각자가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았다. 또 하나는 내가 만든 잡지의 특별함? (제목에) 그런 식의 방백이 있다고 생각한다.”

- 이충걸 편집장의 에디터스레터를 읽기 위해 ‘GQ’를 본다는 독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내 친구들이니까 나에게 해주는 독선 없는 아부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에게는 이 책의 기능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그동안 보지 않았던 글쓰기의 괜찮은 한 예시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그 외 다른 목적이랄 건 없다. 다만 삶을 이렇게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그 삶 자체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서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다.”

■좋은 글, 기본에 충실할 것

이충걸은 ‘페이퍼’ ‘행복이 가득한 집’ ‘보그’를 거쳐 2001년 ‘GQ’ 한국판 창간부터 편집장을 맡았다. 남성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표방한 ‘GQ’는 패션은 물론 현대 남성이 알아야 할 미덕을 두루 담은 교양지였다. 원산지는 미국이지만 외래어는 필요 이상 사용하지 않았고, 소비의 첨단에 서 있으면서도 소비지상주의를 신랄하게 꼬집었으며, 별책부록으로 단편소설집을 내놓기도 했다. 에디터들에게 ‘자존심이 곧 마케팅’이라 강조하고, 세계 18개국 ‘GQ’ 중 한국 ‘GQ’가 가장 잘 만든다 부르짖었던 이충걸의 주장에는 콘데나스트그룹(본사) 회장조차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한때 이충걸은 ‘GQ’의 가장 큰 독자층으로 군인을 꼽았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요즘 군인들은 무엇을 볼까.

- 지난 18년, 이충걸의 ‘GQ’가 기여한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자는 뭐라고 생각하나?”

- 세련됨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정신이건 차림새건 태도건. 도리어 지금은 그런 것이 희미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GQ’를 만들 당시, 혹은 초창기에는 가로수길과 청담동에 바지의 밑위길이까지 잘 고안해서 옷을 입는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들은 멸종됐다. 너무 이상한 일이지? 내가 기여한 것이 있다면, 외양에 대한 숙고를 하게한 점. 또 하나는 유파가 없는 텍스트를 독자들에게 읽게 하는 경험을 준 것,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GQ>의 문체, 텍스트의 함량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에디터들이 글을 잘 쓰는 게 너무 중요했다. 교정 볼 때는 쉼표의 자간까지 체크했다.”

- 잡지 발간까지 에디터들의 원고는 몇 번이나 읽었나.

“보통 3회 정도, 아쉬움이 있는 에디터의 글은 4번 보기도 했다. 내 기대와 다를 땐 한 교정지 안에 100개를 수정하기도 했는데, 그렇더라도 모든 곳마다 이것을 왜 고쳤는지를 설명했다. 고수인양 화두만 던질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 트레이닝을 할수록 개선되더라. 나중에는 손 안 볼 정도로 탁월하게 진화한 에디터들이 많다. 단지 나는 자신 없어 하는 에디터가 굴러가고 싶어할 때 밀어줬다. 글 쓰는 기술 혹은 재능은 신이 주는 거 같다.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 많이 받아봤을 질문인데,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조건이 있다. 독창성, 문법, 지식. 추가하자면 위트. 미문이 유려하게 펼쳐지는데도 문법을 잘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더라. 나도 ‘화려하네, 복잡하네’ 얘기 많이 들었지만, 문법에서 어긋나면 어떤 훌륭한 글도 나에게는 감흥이 없다.”

-1994년 ‘11월의 왈츠’부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 박정자의 연극 대본을 써오고 있다. ‘노래처럼 말해줘’는 어떤 작품인가.

“58년 무대에 있었던 음악과 노래에 관한 그녀의 진술이다. 일단 대본이 너무 아름답고 구조적으로도 잘 짜여져 있는데 마지막 그녀의 진술을 들으면서 울뻔했다. 내가 쓸 때는 약간 위트도 있고 문장 자체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목소리로 진술을 듣고 있으니 되게 슬프더라. 연습 현장에서도 안 우는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이충걸은 2월 6일부터 16일까지의 공연 기간 중 하루를 ‘이충걸의 친구들을 위한 날’로 지정했다고 말했다. “친구는 서로의 업적의 목격자잖아.” 어떤 친구가 거절할 수 있을까.

18년의 에디터스레터를 모은 책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은행나무).

18년의 에디터스레터를 모은 책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은행나무).

■잡지라는 예술

이충걸은 독자엽서를 통해 에디터를 ‘캐스팅’하는 편집장으로도 유명했다. ‘보그’의 신광호 편집장, 작가로 활동 중인 장우철 전 ‘GQ’ 에디터가 그렇게 잡지계에 데뷔했다. ‘보그’ 시절부터 글 잘 쓰는 독자의 엽서를 따로 빼놨다가 ‘GQ’ 창간 이후 인턴 과정을 거쳐 채용했다. 대기업 계열(두산매거진)임에도 그런 절차가 가능한 것으로 당시 편집장의 권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본다.

- 이충걸의 업적 중 하나가 독자를 에디터로 픽업한 것이다.

“내가 거기에 특기가 있었다. ‘보그’ 있을 때, 내가 편집장이 아니었는데도 애독자엽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면 너무 귀찮은 행위를 하는 거잖아. (잡지에서) 엽서를 뜯어서 손글씨로 관점을 적어서 우체통에 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독자엽서가 이만큼(한 뼘)씩 왔다. 참 글을 잘 쓰는 독자들이 있을 때 내가 따로 빼놨다가 연락을 했다.”

- 대기업인데, 그런 채용이 관철된 것도 대단하다.

“사실 조심스러운데, 사실 편집장이 원하면 시켜야하지 않나. 또 잡지는 대기업이면서도 이질적인 놀이터 같은 측면이 있어서(가능한 일이었다.). ‘보그’ 신광호 편집장은 당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포트폴리오가 필요해서 각 나라 ‘GQ’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비교해보라고 했다. 이틀만인가 해왔고 회사에 낸 건의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너무 잘했지.”

- 어떻게 엽서 한 장으로 에디터의 자질을 알아볼 수 있었나.

“커피 맛을 알기 위해 굳이 한 잔을 다 마셔야하나. 한 숟가락 딱 뜨면 알지. 글 또한 마찬가지다. 엽서 사이즈가 작다고 해서 문법이, 독창성이, 지식이 없는 게 아니잖아. 거기에 인품이 받쳐주면 일할 수 있다. 사실 에디터를 뽑는 건, 공동의 목표를 갖고 어떤 일을 하자고 모이는 거지 친척을 구하는 게 아니지않나. 두루두루 그런 기준으로, 굉장히 본능적으로 뽑았다. 장우철도 독자엽서에서 본 그 비범함 때문에 ‘GQ’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고 일정한 기간이 되어서 면접을 보고 에디터가 되었다. 즐거운 한 시절을 보냈구나, 생각한다.”

- 경리사원부터 책사, 치어리더까지, 편집장이 가져야 할 여러 요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중 어떤 역할을 가장 잘했다고 자평하나.

“노동자로서 그들(직원들)의 권리를 존중했다. 특히 휴가낼 때, 스태프들이 미안해하면서 들어올 때가 많았다. 왜 미안해해야 하나. 잡지 마감 공정에 리스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휴가 다녀)와서 감당하면 되지 않나. (나는) 당연해하면서 ‘가, 이건 너의 권리니까’ 하고 사인했다. 또 하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카리스마라고 생각하는 악습들이 있다. ‘전에 있던 회사에서 그렇게 배웠니? 너네 어머니는 그리 자주 아프니?’ 이런 거. 단 한번도 그렇게 말한 적 없다. 인격적으로 그들에게 대미지를 입히거나 팀장이라는 본성적인 지위로 그들을 함부로 대한 적은 한번도 없는 거 같은데, 그들은 딴 얘기를 하겠지(웃음).”

- 전통의 잡지 폐간 소식이 간간이 들린다. 지금 시대, 잡지는 무엇일까.

“잡지는 삶의 식단에 있는 반찬 중 하나다. 손이 잘 안 가는 반찬일 때가 있지. 어떤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할 때, 실망이 더 커질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 ‘너에게 나의 용도는 뭐니?’라고 물을 때의 비참함이 있지 않을까.”

- 이제 잡지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잡지가 이미 분화되어 여러 형태로 나아가고 있지 않나. 물성으로서의 잡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액정화면에서의 분화된 잡지도 나름대로 형태로 증식하고 있다. 어제 어떤 분이 나에게 죽음에 관한 글이 실린 잡지의 세네카(책등)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그 책이 갖고 싶더라. 그런 잡지라면 다시 옛날처럼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라는 이름의 장르

이충걸은 <어느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2002)에 이어 ‘나의 친구, 나의 투정꾼, 한 번도 스스로를 위해 면류관을 쓰지 않은 나의 엄마에게’라는 부제를 붙인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2013)를 썼다. 83세의 어머니와 살고 있는 그의 글은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개척 장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자신의 컨디션을 설명하던 그는 “우리 엄마가 며칠 전에 ‘너는 옛날보다 잘 사는 거 같다’고 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의 언어’를 끌어왔다.

- 잡지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선 뭐라고 하셨나.

“우리 엄마는 너무 강성이고 용맹스러운데 그래도 어떤 이슈가 있을 때 항상 나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얘기했을 때 그게 엄마에게 쇼크였다 하더라도. 사실 당시 엄마는 ‘돈은… 그만 벌어?’라고 재정적인 압박축구를 하셨다(웃음). 요즘은 놀라운 일이 있다. 매일매일 선물이 온다.”

- 대체 어떤 선물이 오고 있나.

“뭐 과일부터 시작해서 육류, 책, 건강보조식품, 비타민…가족이 농사지은 거라며 세 명의 친구가 쌀을 선물했다. 내가 화장품 잘 안 쓰고 세타필 같은 바디로션을 얼굴에도 바르는데 그것도 보내준다. 어떻게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선물을 보내는지, 우리 엄마가 너무 이상하다고 한다. 어느날은 ‘친구들에게 선물 받는 ’이것‘이 오늘도 계속 되었어’라고 말한 뒤 엄마랑 나랑 부엌에서 껴안고 막 좋아했다(웃음).”

- 귀 뒤에 있는 그림은 타투인가. 언제 했나.

“일 그만두자마자 했다. 도마뱀이랑 별이다.”

- 왜 본인에게도 잘 보이지도 않는 귀 뒤에다 했나.

“엄마랑 있으니까 너무 보이면 안되는데 또 너무 안보이면 아쉬울 거 같았다. (나는 잘 안보여도) 남들이 보고 의미를 찾아준다. ‘도마뱀은 재생의 상징이잖아. 형이 부활하시려나봐요’ 이런 식으로. (엄마에게는) 결국 한달 만에 들켰다(웃음). 엄마가 이걸 보더니 ‘이게 뭐야? 너 땜에 내가 못 살겠다’고 하시더라. 아, 정말 문신 정도는 해도 되잖아(웃음).”

- 타투에 뭔가 거룩한 의미를 담았을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 도마뱀은 귀엽더라. 또 흔한 말이지만 별은 우리의 조상이잖아. 나는 별로 심각한 게 없는 것 같다. 지금 나에게는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가장 크다. 그 외 엄마가 없을 때의 공포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

- 어머니에 대한 글을 또 쓸 건가?

“엄마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다. 엄마가 된장을 담그고 해마다 김장도 하는데 ‘내년 김장에는 갈치를 좀 더 넣어야겠어’라고 말하면 너무 기쁘다. 그 말은 엄마가 1년 동안 또 살아계신다는 말이잖아(웃음). 그 말이 나를 너무 기쁘게 한다. 책에 ‘부모는 결국은 어딘가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대하라’고 썼다. 어쨌든 부모는 먼저 돌아가시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엄마가 어느 날 없다면 그 커다란 공허를 어떻게 컨트롤할지 잘 모르겠다.”

- 그런 마음은 평소에 잘 표현하고 있나.

“‘엄마 사랑해, 엄마도 나 사랑해?’하면 우리 엄마는 ‘응 사랑해’가 아니다. ‘지 자식 싫다는 사람이 어딨니?’ 꼭 요렇게 말씀하신다. 항상 그렇다. 그게 쑥스러운가봐. 그런데 가끔은 ‘나도 사랑해’ 할 때가 있다. 매일 아침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면 나는 엄마를 부르면서 다가가 꼭 껴안는다. 왜냐면 나이든 사람은 아무도 손 안대잖아.”

신간에서 그는 “시력의 절반이 소실돼 시각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이후로 (날벌레들이 나는) 그 광경을 본다기보다 느꼈다”고 고백했다. 사진 | 나승열

신간에서 그는 “시력의 절반이 소실돼 시각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이후로 (날벌레들이 나는) 그 광경을 본다기보다 느꼈다”고 고백했다. 사진 | 나승열

■다정한 교감 기질

인터뷰 중간 이충걸은 단골식당 셰프가 인사를 하자 출판사로부터 받았다는 책 10권 중 한 권을 꺼내 “여력(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준다”며 건넸다. 그 와중에 “‘내가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하고 물어본다”는 엄포도 잊지 않았다. 범인들에게는 뜨끔할 주문이지만, 이충걸에는 별일이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시각 기억 능력자처럼, 이충걸은 문장을 통으로 기억하는 능력자 같다. 문장에 대한 그의 탐식은 집착에 가깝다. “변변찮은 재능”라던 그는 이내 좋아하는 곡이라며 심수봉의 노래 ‘이방인’의 가사를 낭송했다.

-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

“최근 독서모임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인상적인 책을 말한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 그런 책은 그 책 한권만 쓰고 죽었다 하더라도 불후라는 훈장을 달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내가 기질적으로 사고체계가 구조적이 아니라 그렇게 쓸 수 없을 거 같고.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는 글도 듣도 보도 못 했던 소설이다. 존재감만큼은 건전지에 혀를 댄 만큼 아리다. 에르베 기베르의 <천국>은 진술 자체가 모르핀의 바다에 빠지는 것 같다. 이미지가 분명하지 않은데, 느껴진다. 말이 좀 이상한데 그런 것이 나의 기질에 좀 맞는다. 정확한 구획 구성, 단락 속에서 명확히 내가 하고자 하는 소스를 보태는 그런 식의 면도날 같은 책에 난 없으니까. 항상 그런 생각은 했다. 서사에는 약하지만,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에서는 내가 가장 빼어나다고. 어떤 묘사는 그래도 나만의 독창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그런 기대가 있다.”

이충걸은 2011년 출간된 소설집 <완전히 불완전한> 영국판 발행을 준비하며 번역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이탈리아 남성복 브랜드 ‘슬로웨어’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마르코라는 지인이 그 소설에 흥미를 보여 번역본을 보내준 적이 있다. 이후 밀라노에 갔을 때 마르코의 초대를 받아 사무실을 방문한 그는 1940년대 바우하우스에서 만든 것 같은 회사 로비에서 두 번 놀랐다고 했다.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건물의 조형성에 한 번, 그리고 로비에서 바지를 벗은 마르코 때문에 또 한번. 그의 양 허벅지에는 ‘완전히’와 ‘불완전한’이 각각 쓰여져 있었다. 한글 명조체로. 타투의 주인공은 “너의 소설이 갖고 있는 그 기이함과 빼어남을 가슴에 새겼다”고 설명했다. 이충걸은 “한국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소설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말했다.

- 무엇을 가장 잘하는 거 같은가.

“우리 엄마는 두 가지를 얘기했다. ‘네가 잘하는 건 두 가지. 처먹는 거랑 책 보는 거’(웃음). 내가 보기엔 책 보는 거와 술을 앞에 두고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걸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것 같다. 왜냐면 내가 한국사회에서 보통 볼 수 있는 남성들의 - 말이 좀 위험한데, 내가 그들과 너무 다른 것 같다. 나는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유머러스하고 다소 시니컬하지만 결국 건강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거든. 고뇌를 꺼내어 서로 그 크기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나락으로 깊이 빠지는 지를 경쟁하는 언어의 패턴들 있지 않나. 무엇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얘기는 서로 얼마나 늙었고. 흰머리가 얼마나 늘었고 하는. 그런 게 정말 이상하다.”

- 왜 그런 얘기들만 나눌까.

“상대방의 장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얘기해줄 수가 없는 거다. 또 하나는 그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장점을 내가 얘기해줌으로써 그 사람이 그걸 인식하는 그 순간, 그 장점을 무기로 그 사람이 도약할 것이 싫은 거다. 인생은 게임, 시합이니까. 그런 경우가 되게 많다. 나는 다른 사람 장점을 얘기해주는 게 정말 좋다. 나의 어떤 참견, 혹은 간섭을 터전으로 그 사람이 조금 더 행복하다면 나도 기쁘다. 난 약간 교감 선생님 기질이 있는 거 같다.”

- 교장이 아니라?

“적당한 책임감으로 석양 무렵에 아이들이 발 다칠 까봐 잘 안보이는 눈으로 사금파리를 줍는 교감 선생님의 마음.”

- 많은 사람들이 이충걸은 비판에 강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설가이거나.

“그렇지 않다. 독설로 뭘 달라지게 할 수 있지?”

■책 쓰는 베토벤

인터뷰 이후 이충걸은 ‘사라진 것에 대한 불가능한 추억’이란 제목의 짧은 글을 보내왔다. “글을 쓸 때마다 굉장히 독특한 좌절을 느껴. 나는 책을 읽어야 되고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인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내가 실명 직전까지 책을 썼던 갈릴레오도 아니고… 왜 눈이 좋았을 때는 원 없이 나태하다가 이제 와서 부산스러울까.” 글을 쓸 때 글자 크기를 최대로 하고 모니터를 띄워놓는데도 때로 커서를 찾기 힘들다면서도 장편소설 작업에 한창이라고 했다. 신간에서 그는 “시력의 절반이 소실돼 시각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이후로 (날벌레들이 나는) 그 광경을 본다기보다 느꼈다”고 고백했다.

- 독서 커뮤니티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었다.

“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GQ’를 할 때는 렌즈를 겹쳐 쓰고 했지만 그건 생업이니까 그랬던 거고. 그 외 활동은 할 수가 없었다. 트레바리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지 않나. 그건 나를 위한, 정말 이기적인 동기였다. (트레바리에서) 너무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굉장히 비범한 여성들. 텍스트를 해체한 다음 내면화시켜 자신의 스토리로 만드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다. 남자들은 책 안 읽지 않나. 나는 여자들이 남자를 목줄에 채워 사육할 날이 올 것 같다. 책을 읽지 않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

- 이렇게 눈을 맞추며 얘기하는 걸 봐서는 눈이 나쁜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 시각장애인 카드도 있다. 지하철도 무료다. 전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안구를 건드린 게 모두 7번이다. 옛날에는 흑임자처럼 작은 글씨도 다 읽었는데 이제는 (안경에) 렌즈를 겹쳐서 쓰고 봐야 한다. 책에도 썼지만 흐린 날 아침 강물 위에 떨어진 신문같이 사물이 일렁인다.”

- 80세까지 편집장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

“그때는 건강했으니까. 시력으로 너무 힘드니까 의자에 앉아 있다 보면 그냥 몸이 거꾸로 접히는 거 같았다. 모든 것이 시들하고 내 기쁨이 하나도 없었다. 시력이 훼손된 것에 견줄 만한 고통이 있을까. 가끔은 귀가 잘 안 들렸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한쪽 다리가 없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한다. 그런데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얼마나 행복지수가 높아졌는지 모른다. ‘예전에 내가 불행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사람들 앞에 설 기회가 있었는데 행복에 대한 얘기를 했다.”

- 이충걸이 행복에 대한 얘기를 한다는 게 낯설다.

“이상한가? 신바람 황수관 박사 같은가?(웃음) 그만두고 나서 어떠냐는 질문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오늘의 즐거움과 겨룰 만한 어제는 없을 것 같이 즐겁다. 행복이라기보다는 굉장히 허심탄회한 즐거움이 매일 계속되고 있다. 일을 하는 것은 부서와 부서, 개인과 개인, 입장과 입장들이 결국 부딪치는 것이고 그때 마멸되는 우리들의 개인성이라는 게 있잖나. 난 그런 걸 정말 못 견디는 것 같다.”

- 아쉬움이 남지는 않나.

“하나도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다 바친 연애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재도 안 남는다. 치앙마이 라후족 처녀처럼 목에 링을 스무 개쯤 쓰고 고고하게 산 적도 없다. 직업인으로서 충실하다가 마지막에 신체가 허물어졌지. 그 시절이 지나고 이렇게 책 한 권으로 정리정돈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단아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그렇게 완결된 것에 대해 그 어떤 자랑도 후회도 미련도 훈장도 없다. 이걸로 족하다. 나는 이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웃을 수 있다.”

그는 에디터스레터를 두세 번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들에게 “두세 번 읽어도 어렵다면 네 번 읽어”라고 응수하곤 했다. 프라다를 입는 악마 못지않은 독설가 같지만, 그는 몸에 밴 듯 듣는 이가 낯설어할 용어는 천천히 두 번 말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유용하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 가치 있는지 말해주고… 독자를 웃게 하고 싶었다”던 걸출한 잡지쟁이의 퇴장은 아쉽지만, “언어를 사랑하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로맨스 중 하나”라고 말하는 문자 노동자의 마감은 계속된다. “책을 쓰는 미미한 베토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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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임신중지 합법화 반대 시위 이란 미사일 요격하는 이스라엘 아이언돔 세계 1위 셰플러 2년만에 정상 탈환 태양절, 김일성 탄생 112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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