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길…‘마음지팡이’는 작은 불빛입니다읽음

민서영 기자

오늘 세계 ‘흰지팡이의날’…‘마음보듬사’로 사는 시각장애인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좋은’씨가 13일 서울 서초구의 한 빌딩에서 마음보듬방으로 걸어가고 있다. 권도현 기자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좋은’씨가 13일 서울 서초구의 한 빌딩에서 마음보듬방으로 걸어가고 있다. 권도현 기자

서울대 협동조합 ‘봄그늘’서 운영
암막 환경에서 익명으로 대화
“비장애인으로 살다 한순간 장애
힘들어봤고 극복해본 경험 공유
볼 순 없지만 마음을 보게 됐죠”

매년 10월15일은 ‘흰지팡이의날’이다.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980년 지정한 것으로, 올해 41주년을 맞았다.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를 상징한다. 흰지팡이로 길 위의 장애물을 가늠하며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보행하는 데서 착안했다.

스스로 길을 걷고, 더 나아가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시각장애인들이 있다. 서울대 학생들이 운영하는 협동조합 ‘봄그늘’ 소속 시각장애인들은 ‘마음보듬사’로 활동한다. 봄그늘이 개발한 ‘블라인드 마음보듬’ 서비스는 암막 환경에서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와 50분간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이다. 서비스는 철저히 익명으로 진행돼 오로지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다. 현재 활동 중인 6명은 보건복지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인증한 마음보듬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지난 13일 기자와 만난 마음보듬사 ‘좋은’씨(26·활동명)는 2017년 군 복무 중 원인 모를 희귀병으로 시력을 잃었다. 의병 전역 후 두 달간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20년 평생을 비장애인으로 살던 그는 짧은 칩거를 끝내고 시각장애인의 삶을 터득해나갔다. 점자를 배우고, 음성리더기를 사용하고, 흰지팡이도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 됐다.

익숙해져도 여전히 모든 게 어렵다. 남들보다 늦게 배운 점자는 읽어내지 못할 때도 많고, 정류장에 온 버스가 몇 번인지 몰라 지하철만 탈 수 있다. 일상의 어려움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직업 선택’의 문제였다. “제게 있던 선택지가 복학, 아니면 안마를 2년 동안 배워서 안마업에 종사하는 것, 그것도 아니면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이 전부였어요.” 평범한 대학생이던 그에게 안마사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직업이었다. 고민을 하던 차에 마음보듬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재활 과정에서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이제 직접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어주기 시작했다.

“저는 시각장애인이 되고 얼마 안 돼서 마음보듬사를 하기 시작했거든요. 사실 그때 자활 교육과 동료 상담도 받았지만 마음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어요. 장애인이 되니까 뭘 할 때마다 주위에서 도와주려 하는 거예요. ‘아, 난 이제 평생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됐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런 그가 마음보듬사 일을 시작한 후엔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됐구나”라고 생각했다. 우울감을 호소하던 한 고객은 서비스 경험 후 “답답하고 불안했던 어둠이 이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장문의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비장애인으로 살다 한순간에 장애인이 된 힘든 기억이 마음보듬 일에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제가 너무 힘들어봤고, 너무 힘든 걸 조금은 극복도 해봤으니까 무거운 이야기들을 너무 심각하게 듣지 않을 수 있어요. 저도 그랬는데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옆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들어주면 되게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좋은씨는 장애인을 “일상에 섞여 같이 사는 사람”으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시각장애인이 유리문이 보이지 않아서 부딪혀 넘어질 때가 있어요. 보통 비장애인이 그러면 친한 친구들은 깔깔대고 웃기도 하잖아요. 근데 주변 사람들이 저에겐 항상 괜찮냐며 걱정해요. 저도 그냥 똑같은 사람으로 봐주면 어떨까, 넘어진 절 보고 웃을 수도 있는 거고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좋은씨는 “마음보듬사 일을 열심히 하며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앞은 볼 수 없어도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줄 아는, 이름대로 ‘좋은’ 마음보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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