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쇳밥일지’ 천현우 “거둬주세요, 하청 노동자 향한 연민의 시선”읽음

박주연 선임기자

[주간경향] 청년 용접노동자 천현우씨(32)의 존재를 처음 인지한 건 지난해 4월이었다. 한 출판사 대표가 공유한 그의 페이스북 글을 읽으면서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이대녀(20대 여성)·이대남(20대 남성) 표심이 엇갈리면서 그것과 관련한 논쟁이 뜨거울 때였다. ‘대한민국 최하층에서 바라본 20대 남성들의 이반 투표’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존재하는지조차 잊고 있던 변방에서 날아온 통렬한 ‘비수’ 같았다.

그가 얼마전 자신의 이름으로 첫 에세이를 펴냈다. <쇳밥일지>(문학동네)다. 용접노동자로 일하면서 주간경향에 연재한 ‘쇳밥일지’와 ‘쇳밥이웃’에 전사(前事)를 더하고 개고해 묶은 책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8월 3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서둘러 소개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고 추천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생생한 날것의 흙수저 삶과 현장 이야기가 깊고 묵직한 여운과 고민을 안겨준다.

지난 9월 13일 천현우씨를 만났다. 그는 노키아부터 ISO 탱크 컨테이너 정비업체, 현대로템 하청업체, SNT중공업 하청업체, 볼보 하청업체에 이르기까지 지난 12년 동안 수많은 공장을 전전했다. 그중 후반 6년은 용접노동자로 살았다. 올해 3월부터는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alookso)’에 합류해 언론인의 길을 걷고 있다. 천씨는 “서울생활도, 취재도 아직은 낯설어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쇳밥일지>를 펴낸 천현우씨가 지난 9월 13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야외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쇳밥일지>를 펴낸 천현우씨가 지난 9월 13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야외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어릴 때부터 써온 일기가 글근육 키워
“과거의 일기장이 글쓰기에 참고 많이 됐어요”

-책은 어떻게 내게 됐나요.

“주간경향을 보고 문학동네에서 작년 8월에 연락을 주셨어요. 주간경향 연재글은 제 이야기지만 노동 르포에 가까워요. 노키아부터 볼보 하청업체까지 제가 공장에서 일했던 12년과 그 과정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3명의 인터뷰로 구성된 글이었어요. 문학동네는 주간경향 연재글에 앞뒤 맥락을 추가하면 왜 제가 용접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었는지 짐작케 하는 좋은 에세이가 될 것 같다고 하셨어요.”

-과거의 얘기는 어떻게 기술했습니까.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 일기를 썼어요. 집에 돌아오면 혼자여서 딱히 할 일이 없었거든요. 장난감도 없었고, 친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으니까요. 일기는 성인이 돼서도 계속 썼는데, 과거의 일기장이 글쓰기에 참고가 많이 됐어요.”

-<쇳밥일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궁극적 메시지는 뭔가요.

“제가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 사람들은 ‘나는 그런 곳(저임금의 열악한 중소기업 생산직 노동현장)에서 못 산다’, ‘지옥이다’라며 동정하듯 말했어요. 마치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그곳에서 성실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고,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저의 파편적인 12년의 경험담을 서술한 내용이 본의 아니게 노동 현실 고발로만 읽히는 게 조금 아쉬워요. 무엇보다 지방 하청공장 생산직 노동자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지 말았으면 해요.”

천현우라는 청년 용접노동자가 처음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그가 2021년 4월 11일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올리면서다. 직전 4·7 재보궐선거는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 당선 등 국민의힘 압승과 더불어민주당의 참패로 끝났다. 특히 오세훈 시장은 20대 남성에게 72.5%라는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언론과 SNS,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앞다퉈 원인 분석에 나섰다. 거기에 지방 현장의 2030 청년노동자 목소리는 없었다. 천씨는 페이스북에 2030 공장노동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왜 절망과 냉소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를 썼다. 반응은 뜨거웠다. 그의 글은 하룻밤 새 수없이 공유됐다. 당시 페북 글과 관련해 천씨는 <쇳밥일지>에서 “이십대 남성은 공정론, 한탕주의, 일베와 펨코, 안티 페미니즘이란 문자의 감옥 안에 갇혔다. 젊은 친구들 말 좀 들어보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결국 수도권 대학생들만 예시로 들 뿐, 지금껏 내 삶에서 함께해왔던 동료의 목소리는 바깥으로 가닿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좀 과장하자면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된 거네요.

“페이스북 메신저가 엄청 많이 오고, 휴대폰도 하루종일 울렸어요. 언론사로부터도 출연과 칼럼 제안이 들어왔고요. 150명 수준이던 페북 친구는 하루 동안 400여명이나 증가했어요.”

-당시 어떤 심정으로 그 글을 쓴 건가요.

“진보진영의 많은 분들은 2030 남성들이 뭘 몰라서 국민의힘 후보를 찍었다는 식으로 주장했어요. 그래서 제가 처한 현실에서 20대 남성이 느꼈던 불안감과 박탈감의 지점을 입시·취업 과정, 노동소득과 고용불안, 남녀 간 깊어지는 갈등 이 세가지로 압축하고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적은 거예요. 공정을 말하면서 종종 들먹이는 능력주의는 공평하지 않으니까요.”


<쇳밥일지> 표지 | 문학동네

<쇳밥일지> 표지 | 문학동네

지난해 4·7 재보궐선거 이후
페북에 쓴 ‘2030 공장노동자의 현실’ 반응 뜨거워
신문·잡지 칼럼 쓰고 방송 출연도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나요.

“가난하면 명문대 들어가기가 훨씬 힘드니까요. 극소수의 ‘개천용’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을 쥔 쪽이 무조건 유리하죠. 입시는 곧 취업으로 연결돼요. 대기업은 명문대 등 수도권 4년제 대졸자가 차지하고, 지방의 고졸이나 속칭 ‘지잡대’ 출신 다수는 임금을 비롯한 모든 게 열악한 중소기업으로 가게 되죠. 특히 생산직 분야는 취업시장 최하층에 위치해 있어요. 중장년 꼰대들의 폭언과 산재 위기에 항상 노출돼 있죠. 직급이 올라도 임금이 거의 안 오르니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도 어려워요.”

-이른바 한동안 언론에 오르내린 ‘이대남, 이대녀’ 논쟁과 갈등이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겠군요.

“저로선 잘 와닿지 않았어요.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던 사람들끼리 저렇게까지 더 달라고 싸워야 하나?’, ‘대학에 갈 수 있으면 나머지는 다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죠.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 놀란 것은 워크넷에 용접 구직을 했을 때였어요. 제가 살던 마산에서는 진짜 별로 답이 안 오는데 서울에서는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서류 넣어보겠냐는 문자가 왔어요. 그만큼 일자리가 많고 시급도 훨씬 높더라고요. 수도권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축복이구나 싶었어요.”

-페이스북 글을 계기로 신문과 잡지 칼럼을 쓰고 방송 출연에 이어 이렇게 에세이까지 냈는데, 2030 공장노동자들의 반응도 접합니까.

“별로 없어요. 제 이야기가 정작 우리들을 뭉치게 하는 힘이 없으니 안타깝죠. 제 글이 우리의 현실을 먹물들에게 전달하는 데 포커싱돼 있기 때문이에요. 포터 아저씨(천현우씨에게 용접의 세계를 알게 해주고, 편입 실패와 학벌 콤플렉스에 빠진 그에게 ‘우리가 훨씬 대단한 거야. 기죽지 마’라며 늘 용기를 북돋아준 은인)가 그랬어요. 우리 판때기에서 쓰는 말들이 있는데, 그 상스러운 걸 칼럼에 다 그대로 실을 순 없잖냐고. 그렇다고 먹물들 말로 쓰면 맛이 안 살고 그 중간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 니가 그걸 잘하더라고.”

-지난 정부에서 1년간 청년정책조정위원회에서도 활동했는데, 그렇게 다양한 외부활동을 하며 터득한 게 있다면 뭔가요.

“한국 정치 지형이 약자한테 너무 무관심하다고 느껴요. 출근시간대 지하철 시위를 벌이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나 사방 0.3평 철창 안에 몸을 구겨넣은 채 31일간 농성을 벌인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의 파업에서 보듯, 소수자는 진짜 목숨 걸고 극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알아봐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방 공장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아무리 열심히 전달해도 잠시 관심을 둘지는 모르지만 금세 풍화되고 말 거라는 서운함이 있어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우리를 모른 척하며 살아가겠죠.”

이전 그의 삶은 수많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거쳐온 삶의 거울일지 모른다. 그래서 용접노동자 천현우가 살아온 이야기는 무엇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인지를 엿볼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수 있다.

그는 1990년 마산에서 태어났고 두 살 때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는 “바람둥이 날건달”이었다. 바람을 피우다 집을 통째로 날린 아버지와 이혼한 심 여사는 생모는 아니지만 가슴으로 낳고 기른 여덟 살 된 그를 데리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여관방을 전전하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심 여사는 식당일을 하며 혼자 그를 키웠다. 하지만 심 여사가 아프면서 아버지와 살게 된 그는 급기야 영양실조로 쓰러졌다. 그때 처음 나타난 생모는 1년을 같이 사는 동안 툭하면 어린 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낙상해 발목뼈가 으스러지고 나서야 그는 바람대로 다시 심 여사와 살게 됐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뻐했지만 가난은 늘 모자의 삶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초등학생 때 여관방에서 살았던 기억은 어떤 건가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심 여사)는 일하러 나가시고 저는 혼자였어요. 서울말 쓰는 저와 놀아주는 친구는 없었어요. 그래서 일기를 썼고, 저녁에는 TV로 만화영화를 봤어요. 점심식사는 학교에서, 저녁밥은 어머니가 출근 전 차려놓은 것을 먹었어요. 아침은 굶었고요. 어머니의 일이 늦게 끝나다 보니 아침까지 주무셨거든요.”

-여관방에서는 언제 벗어날 수 있었나요.

“제가 생모라는 사람의 폭력에서 벗어나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원룸에 살고 계셨어요. 어머니는 저 때문에 재혼도 안 하셨어요. 제가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크다 보니 자극하기 싫었다고 하세요.”

-어떤 트라우마요.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기는커녕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했어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다반사였고, 어쩌다 집에 돌아와도 데리고 온 여자와 자며 저는 침대 밑 바닥에서 자게 했어요. 방치된 시간이 길다 보니 제가 영양실조에 걸린 거고요.”

-어릴 때 꿈은 뭐였습니까.

“매달 20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월세가 밀리는 달이 많았거든요. 특히 중학교에 입학한 후 교복을 사고 나니까 어머니가 되게 힘들어하시는 게 보이더라고요. 귀가 시간도 점점 늦어지시고.”

-웹소설로 잠깐 돈을 벌기도 했고, 신춘문예에 도전도 한 것을 보면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것 아닌가요.

“중학생 때부터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본격적으로 쓴 것은 공장에 다니던 스물두 살 때부터였어요. 온갖 공모전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어요(웃음).”

-한국에서 그나마 계층 사다리가 되는 것은 명문대 졸업 후 의사나 판·검사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거예요. 공부에는 뜻이 없었습니까.

“어릴 때는 공부가 재미없었어요. 우리는 ‘공부 못하면 기술 배워라. 그러면 가정도 꾸리고 어엿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그래서 실업계고(경남전자고)를 간 거예요. 그런데 아니었던 거죠. 그 말을 믿고 10년을 뼈를 갈아넣었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하는 좌절감과 당혹감을 느꼈어요. 무슨 짓을 해도 혼자 벌어선 식솔들을 먹여 살리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지방은 아직도 가족주의가 굉장히 강한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것도 쉽지 않아요. 젊은 여성이 별로 없거든요.”

-실업계 고교 시스템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없습니까.

“MB가 ‘기술강국 코리아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을 한다며 마이스터고를 만들었는데 장단점이 있어요. 2017년 제주도 생수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고교생이 기계에 몸이 끼이는 협착사고로 사망했잖아요. 현장에 맞춰 안전교육을 사전에 철저히 해야 했음에도 안 했던 거죠. 또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장에서 겪는 부조리를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 거예요.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선 ‘위험한 것 같은데요.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옳은 행위, 합법적 행위임을 가르쳐줘야 해요.”

천현우씨가 중장비 용접을 하고 있다. | 천현우씨 제공

천현우씨가 중장비 용접을 하고 있다. | 천현우씨 제공

“중학교 과정에서부터 노동법 관련 교육 필요
‘위험한 일은 못 하겠다’ 말할 수 있어야 하죠”

-산업현장에 생산직 노동자로 바로 투입될 학생들인 만큼 실업계고에서는 노동법 관련 교육이 선행돼야겠군요.

“꼭 알아야 할 노동법 내용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해야 해요. 산업재해를 당해도 노동법을 모르면 권리를 찾지 못하잖아요. 또 거듭 말하지만 ‘절대 쫄면 안 된다, 위험한 일은 못 하겠다고 말하라’고 지나칠 정도로 얘기해줘야 해요. 현장실습 사망 사건 대부분이 거절하지 못해 발생하는 거거든요. 저는 이런 교육이 중학교 과정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각자도생만 가르치는 이 사회에서 과연 힘을 합쳐 돌파하라는 교육이 가능할까요?”

그도 2년제 기능대학인 폴리텍 전자과 졸업반 때 창원 신촌 공단에 있는 효성 하청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고온에서 액체 상태였다가 실온에서 고체가 되는 에폭시수지를 온장고에서 꺼내 금형에 붓는 작업이었다. 출근 첫날 섭씨 400도 온장고에서 갓 나온 에폭시수지가 담긴 40㎏이 넘는 통을 50㎏을 겨우 넘긴 체중의 그가 들고 옮기다 떨어뜨렸다. 그의 발등에 수지가 쏟아졌다. 현장은 우왕좌왕했고, 초기 냉각이 중요한 화상은 1시간이 넘도록 방치됐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장은 그를 동네 의원에 데려가 파상풍 주사와 항생제만 맞혔다. 결국 어머니와 찾아간 다른 병원에서 의사는 “딱 1㎝만 더 들어갔으면 발목 자를 뻔했다, 산재 처리 안 해주더냐”면서 “입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천씨는 출근 첫날 회사를 관뒀을 때 생길 불이익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발등에 화상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천씨는 “그때 만약 산업안전보건법을 알았더라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쇳밥일지> 본문과 표지띠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도대체 누가 이런 현실을 알아줄까? 기자? 정치가? 금속노조? 진보 지식인? 아뇨. 할 말을 잃어서 할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멍청한 소리였지만 2018년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SNT중공업 사외 협력업체인 창원의 작은 정밀공업회사에 다닐 때였는데, 크레인으로 옮기던 10t 중량의 거대한 철판이 과장님의 다리를 덮치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어요. 내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온갖 나쁜 미래상이 그려졌어요. 하지만 숱하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넘어가잖아요. 저는 그날부터 현장의 모습을 촘촘하게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언젠가 세상에 알리겠다는 심정으로요.”

-이후 과장님 소식은 들었나요.

“발목 절단 수술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어요.”

-노조가 결성돼 있다면 나았을 텐데, 중소기업은 노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을 규합해 노조를 결성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을 테고요.

“찍히면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저는 SNT중공업의 사내 하청업체인 정진테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노조의 개념조차 몰랐어요. SNT중공업과 정진테크 직원들이 한 공장에서 일했는데 하청직원이어서 겪은 차별이 컸어요. 여름 용접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에요. 하지만 현장에 냉방기는 없었어요. 선풍기를 쐬면 바람맞은 용접 부위에 구멍이 송송 뚫리기에 맨몸으로 버텨야 했고, 힘은 쭉쭉 빠져나갔죠. 그런 어느 날 낮잠을 잘 수 있는 에어컨이 구비된 휴게실이 있음을 알게 돼 이용했더니, SNT중공업 정직원 노조원 아저씨가 저를 막아서요. 하청직원은 노조가 투쟁으로 얻어낸 휴게실을 이용하면 안 된다고….”

-서러웠겠군요.

“샤워실도, 통근버스도 제공되지 않는 터라 잔업 후 땀에 찌든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버스를 타고 퇴근하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서럽고 착잡했어요.”

천현우씨가 지난 9월 13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이동한 인근 국토발전전시관 앞마당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천현우씨가 지난 9월 13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이동한 인근 국토발전전시관 앞마당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지난 3월부터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서 새 도전
이젠 쇳밥꾼 아닌 먹물로 살아가고 있어
다음 책은 산업재해 이야기가 될 듯

-대우조선해양 하청 비정규직 노조원들의 분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제가 당시 조선하청지회를 직접 방문했는데, 여성 파워공(선박의 표면을 전동 그라인더로 갈아 매끈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분들의 활동을 보면서, 하청도 앞으론 점점 이렇게 서로 연대해 공론화할 수도 있겠구나, 희망을 가졌어요.”

그는 한때 4년제 대학 편입을 준비했다. 온라인 게임으로 만나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난 친구의 전문대 비하 발언에 자존심을 크게 다쳤고, 전자과의 경우 2년제를 나와선 취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편입 자금을 모으려 잔업과 특근에 주말이면 공사현장을 누볐다. 심 여사도 아들의 편입을 위해 빚이란 빚은 다 끌어다가 화투판에서 이자 장사를 하며 힘을 보탰다. 하지만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심 여사가 믿던 동생에게 사기를 당해 8000만원의 빚을 지게 됐기 때문이다. 천씨는 채권자들에게 심 여사의 빚을 자신이 갚겠다고 나섰다. 200만원 월급에서 다달이 140만원을 갚아나가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더욱 궁핍해졌다.

-어머니의 빚은 다 갚았습니까.

“아직 600만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점은 인생의 길목 길목에서 만난 좋은 인연들이다. 어머니 심 여사와 포터 아저씨를 비롯해 노키아공장에서 재회해 도움을 준 초등학교 동창 은주씨, 정진테크에서 만나 독서의 근육을 키우게 해준 초원씨, 그리고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저자이자 그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경청해준 양승훈 경남대 교수 등이다.

천씨는 삶의 터전을 옮겨 지난 3월부터 미디어 스타트업 ‘얼룩소’에서 기자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쇳밥꾼이 아닌 먹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걸었던 길 위에 서 있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전달하려고 한다. 책도 또 펴낼 생각이다. 그는 “아마도 다음 책은 산업재해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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