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두보’…갈대에서 낙타로 당신의 시는 함박눈처럼 왔습니다

유시춘 EBS 이사장

신경림 시인 영전에

유시춘 EBS 이사장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시 ‘농무’로 흔히 민중을 문학의 세계로 빛나게 소환한 시인으로 회자되는 신경림 시인의 첫 작품 ‘갈대’이다. 휴전된 지 5년, 전쟁으로 파괴된 산하는 헐벗었고 국민 절대다수의 삶은 가난하고 피폐하던 즈음이었다.

시인은 스무 살 남짓한 때에 남루한 현실의 저 깊은 심연을 본다. 모든 인간존재의 본질, 그 깊은 슬픔을 자각한다. 이 첫 작품은 이후 그의 ‘민중시’를 결코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조용히 강원도, 충청도를 궁핍하게 떠돌며 산다. 그러다가 1975년 창비시선 1번으로 시집 <농무>를 출간한 이후 ‘갈대’의 내적 고요한 슬픔은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되고 그 지평을 넓히게 된다.

거기다가 실질적인 박정희 종신집권체제인 유신의 한가운데서 ‘자유실천문인협회’ 창립을 여러 문우와 함께 주도하고 이후에 대표를 맡는다.

‘민중’이라는 레토릭이 강력한 자장을 형성하던 시기에 시인은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시편들을 묶음으로 토한다. ‘민중’은 결코 철권통치자가 보는 계몽의 대상이 아니었다. 시인에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 그 인물, 가락, 정서, 언어는 혼연일체이다. 이렇게 그의 시는 함박눈처럼 펄펄 날리며 우리에게로 왔다.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 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저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 등 문학청년을 비롯해 ‘민중’이 시대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가치를 받드는 수많은 이가 신경림 시인의 시를 사랑했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국민의 애송시가 되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한 사랑 노래’ 중)

누가 이 시를 이른바 ‘민중시’에 엮겠는가?

1980년 시인은 어이없게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문우들과 함께 징역살이도 한다.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역사의 걸음걸이는 더러 이렇게 황당하게 비틀거린다.

그는 1984년 ‘민요연구회’를 창립하고 민중의 노래를 찾아 방방곡곡을 다니며 그 기록을 <민요기행>으로 출간한다. 이러는 동안 여러 대학에서 민요 연구 모임과 동아리도 탄생한다.

필자는 신경림 시인과 30년간 북한산을 오르내린 ‘산친구’이다. 일요일이면 시인을 만날 생각으로 행복했다. 더러 시인이 좋아하는 빵과 음식을 준비하면서 기쁨이 차오르기도 했다. 난 시인의 ‘낙타’를 무척 좋아한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

누가 함부로 신경림을 ‘민중시인’이라 말하는가. 폭력적이다. 감히 영전에 바치건대 신경림은 한국의 ‘두보’이리라.

유시춘 EBS 이사장

유시춘 EBS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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