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법도 학폭위도 말리지는 않잖아요”···싸움 말리는 엄마들

박용필 기자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이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심의실에서 중재위원의 지도 하에 사과와 화해의 뜻을 담은 ‘약속 편지’를  작성하고 있다.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제공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이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심의실에서 중재위원의 지도 하에 사과와 화해의 뜻을 담은 ‘약속 편지’를 작성하고 있다.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제공

자녀가 학교 폭력 가해자로 신고당했을 때 변호사들은 ‘섣불리 상대 학부모와 접촉하지 말라’고 조언하곤 한다. ‘2차 가해’나 부모들 간 폭력 사건으로 비화할 수도 있고, 사과하는 통화나 대화가 녹취돼 ‘가해 사실을 인정한 증거’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취지다.

그러나 지난 6일 고화정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관계가꿈지원단 대표(49)가 들려준 조언은 좀 달랐다. 오히려 ‘신속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권했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에서 사안을 판단할 때 반성의 정도나 화해의 노력도 따져요. 고개를 많이 숙였다는 게 불리하진 않습니다. 사과 녹취가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더라도 ‘진정성립’(당사자를 불러 증거의 진위나 취지를 확인하는 것)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가해사실의 인정’이 아닌 ‘화해의 일환’이었다는 걸 소명할 수 있어요.”

고씨가 대표를 맡은 ‘관계가꿈지원단’은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산하 학교폭력 중재 기구이다. 학교 폭력 신고가 학폭위에 회부되기 전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을 화해·조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교육지원청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기구로는 서울에서 유일하다.

지난해 11월 활동을 시작한 지원단은 지금까지 조정 신청 27건 중 22건을 성공시켰다. 비결은 모두 ‘학부모’들이라는 점이다. 20명의 학부모가 중재위원으로 위촉됐다. “학부모를 말릴 수 있는 건 학부모”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비결은 ‘라포르(상호 간 친밀감 또는 신뢰관계)’ 형성인 것 같아요. 분노·불신·적대감에 휩싸인 학부모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선배’ 학부모밖엔 없어요. 그래서 가급적 피해 학생보다 나이가 많은 자녀를 둔 학부모 위원이 투입됩니다.”

실제 위원들 상당수는 학교 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 고 대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중학생 때 ‘사이버불링’을 당했어요. 학교에선 급식실도 못갔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아이가 집에 와서 저녁을 많이 먹는다고 좋아했죠... 당시 누군가 중재를 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현재 학교폭력예방법은 학폭 신고가 이뤄지면 ‘보복’ 뿐 아니라 ‘접촉’ 자체를 금지한다. 오해를 풀 기회도, 사과를 하거나 받을 기회도 갖기 어렵다. 달랠 길 없는 불신과 분노는 학폭위 개최로 이어지곤 한다. 법은 피해 학부모가 희망하면 사안의 경중에 관계없이 학폭위를 열도록 규정한다.

일단 학폭위가 열리면 상대측은 반성보단 ‘맞폭’(맞대응 학교폭력 신고)으로 대응하곤 한다. 처벌이 상정되는 만큼 반성보단 방어가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이민아 중재위원(54)은 실제로 ‘무조건 학폭위’가 때로는 사태를 악화시킨다고 했다. “‘째려보는 것 같다’, ‘내 뒷담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정도의 이유로 신고를 하기도 해요. 자녀의 말만 듣고 오해를 한 경우도 있고요. 명백한 증거가 있을 리 없죠. 학폭위를 열고 소송을 해도 ‘강제전학’ 같은 처분은 나오기 어려워요. 결국 같은 학교, 같은 동네에서 계속 마주쳐야 하죠.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로요.”

신재영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장학사(왼쪽부터)와 고화정 관계가꿈지원단 대표, 조진영 부대표, 이민아 중재위원이 지난 6일 서울 북부지원청 학폭위 심의실 복도에서 “학폭 사건의 경우 ‘응보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박용필 기자

신재영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장학사(왼쪽부터)와 고화정 관계가꿈지원단 대표, 조진영 부대표, 이민아 중재위원이 지난 6일 서울 북부지원청 학폭위 심의실 복도에서 “학폭 사건의 경우 ‘응보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박용필 기자

조진영 부대표(45)는 이렇게 되기 전 ‘사과와 화해’의 물꼬를 터주는 게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했다. “법은 ‘소통’보다 ‘격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선생님들은 개입을 부담스러워하고, 그래서 부모는 자녀 말만 듣고...대화로 해결이 가능한 사안도 학폭위나 법정으로 가는 경향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저희들이 중재에 사명감을 갖는 이유에요.”

‘덮어놓고 화해가 능사’라는 얘기는 아니라고 했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첫 번째에요. 저희 같은 3자가 개입된 조사에도 응해보고, 그다음에 조치를 하는 게 순서라는 거죠. 다만 ‘응징했다’ 보다는 ‘용서했다’는 결말이 가해 학생뿐 아니라 피해 학생에게도 더 교육적이긴 합니다.”

‘용서’의 열쇠는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의 ‘진정성’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사과만으로도 물꼬가 트이는 경우가 꽤 있어요. 피해 학부모가 원하는 건 보복이 아니라 ‘아이가 또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거든요.”

‘마법의 첫 문장’으로는 “아이는 괜찮은가요. 마음 아프셨죠...”를 추천했다. “우리 아이가 장난이 심해서...” 같은 말은 자제하는 게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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