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라오스 댐 붕괴’ 참사현장 돌며 공적원조 실상 목도한 윤 활동가
사업으로 변질, 약자들 희생 강요·분쟁 초래 문제 제기 ‘국제연대’ 강조
지인들, 고인 1주기 맞아 뜻 이어나갈 동료 선정 지원하는 ‘펠로십’ 시작
2009년 11월25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에 가입했다. 여러 시민이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됐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수원국(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공여국(원조를 하는 나라)’으로 바뀐 유일한 사례라는 점을 자평했다.
‘한국의 원조가 실제 수원국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고 윤지영 활동가다. 그는 암 투병 끝에 지난해 8월16일 향년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1주기인 지난달 16일 지인들은 ‘윤지영 펠로십’을 시작했다. 향후 3년간 윤 활동가의 뜻을 이어나갈 동료 4명을 선정해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그의 뜻만은 놓아줄 수 없다’는 취지로 시작했다.
윤 활동가가 세간에 알려진 계기는 2018년 7월 발생한 라오스 세피안·세남노이댐 붕괴 사고다. 이 댐은 메콩강 지류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려고 지은 것이다. 당시 한국 회사들이 시공과 운영을 맡았다. 한국 수출입은행이 공적개발원조(ODA)로 955억원을 지원했다.
‘원조’는 ‘재앙’이 됐다. 댐이 붕괴하면서 71명이 사망하고, 13개 마을이 잠겼다. 이재민은 7000명에 달했다.
2019년 초 윤 활동가는 당시 댐 사고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 태스크포스(TF)’의 일원으로 현지를 찾았다. 열흘 넘게 사고 현장을 돌았다. 쇠창살이 칸막이를 대신하고, 양철 지붕 탓에 내부가 한껏 달궈진 이재민들의 ‘임시거처’를 살폈다. 1인당 한 달에 쌀 20㎏, 하루 한국 돈 700원 정도에 불과한 ‘지원금’, 물웅덩이에서 식수를 찾는 생존자들,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플라스틱병에 담긴 희생자의 유골 등을 직접 확인했다.
윤 활동가는 이 프로젝트의 본질에도 주목했다. 이 댐의 최우선 목표는 메콩강 유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 아니었다. 인접국 태국으로 전기를 수출해 라오스 정부의 재정을 확충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시공과 운영을 맡아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게 한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가 투입된 배경 중 하나였다. 일종의 ‘유상 원조’였던 셈이다. ‘윤지영 펠로십’ 운영위원회 문아영 사무국장은 “당시 윤 활동가는 ‘원조가 아닌 사업’이라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일관됐다. 그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1년가량 재직한 뒤 시민사회에 투신했다. ‘지구촌나눔운동’ ‘ODA WATCH’ ‘피스모모’ 등을 거치며 국제원조 감시와 평화정착 관련 활동을 했다. ‘코빌’에선 활동가들끼리의 연대 구축에도 힘썼다.
<SDG16(평화) 논의 및 이행현황 분석> 등 그가 남긴 논문들에선 ‘평화 ODA’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각지의 분쟁과 갈등의 배경에는 빈곤과 불평등이 있고, 이를 완화해야만 평화정착이 가능하다고 그는 봤다. 당사국 혼자만의 힘으론 한계가 있고, 국제적인 연대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결론 짓는다.
특히 원조가 분쟁해결에 이바지하려면 공여자가 아닌 수원자의 관점, 그중에서도 수원국 정부가 아닌 주민 입장에서 설계·집행돼야 한다고 봤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특정 계층의 배만 불리게 되고 불평등이 오히려 심화돼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고 봤다.
이런 시각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이 도움을 받다가 도와주게 됐다’보다 ‘도움을 받아봤기 때문에 제대로 도와줄 수 있다’는 점에 더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논문에서 “한국이 경제개발 경험만 수원국에 전수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배제된 정부 주도의 원조로 특정 기업이나 계층에만 수혜가 돌아가고 약자들은 희생을 강요당했던 사례들도 반면교사로 삼아 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의 사법체계 등에 관한 노하우도 전수해 수원국의 사회정의와 안정회복에도 도움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가 다른 나라 평화에 관심을 가졌던 건 역설적으로 한국 평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가 평화롭지 않은데 한국만 평화로울 수는 없다’고 여겼다. 문 사무국장은 윤 활동가가 첫 직장이었던 외교안보연구원에서부터 이런 시각을 갖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외교·안보 정책의 한계를 느꼈을 거라는 것이다.
“그의 활동은 오해를 받곤 했어요. ‘한가하게 다른 나라 문제에나 신경을 쓴다’는 식이었죠. ‘한국과 세계는 분리돼 있지 않다’ ‘국가 단위로 사람들을 쪼개는 게 오히려 갈등의 씨앗이 된다’는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와 같은 활동을 하는 이도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에요. 그는 생전에 자기 이름이 내걸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희가 ‘윤지영 펠로십’을 추진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