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출마자, 수베디 여거라즈의 멈춰선 희망

조문희 기자

“중도 포기했습니다. 하하.”

네팔 출신 수베디 여거라즈(50)가 기자와 통화하면서 처음 꺼낸 말이다. 그는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의원 비례대표에 도전장을 냈지만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 자진 사퇴였다. 당내 비례대표 순위 경선에서 당선권 밖 후순위로 밀렸다. 수베디에겐 가망 없는 선거운동을 지속할 만큼의 경제력이 없었다.

당선을 기준으로 본다면 수베디의 이야기는 수많은 실패담 중 하나일 뿐이다. 수베디의 사례가 돋보이는 건 그의 경험에서 한국 정치의 사각지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 ‘이주민단체 활동가’ ‘네팔 1호 귀화자’라는 그의 이력 한줄한줄이 기존 정치권에선 찾아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는 “정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전했지만 한국 정치는 아직 열려있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4~25일 이틀 간 수베디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네팔인 일반귀화자 1호 수베디 여거라즈(왼쪽 두번째·50)가 김나현 이주민통번역센터 링크 센터장, 안순화 생각나무BB센터 대표, 이라 다모의료&문화관광협동조합 대표(왼쪽부터)와 함께 지난 4월 서울 중구 경향신문 본사에서 열린 집담회에 참석해 이주민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네팔인 일반귀화자 1호 수베디 여거라즈(왼쪽 두번째·50)가 김나현 이주민통번역센터 링크 센터장, 안순화 생각나무BB센터 대표, 이라 다모의료&문화관광협동조합 대표(왼쪽부터)와 함께 지난 4월 서울 중구 경향신문 본사에서 열린 집담회에 참석해 이주민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이주민 대표 없는 정치 바꾸고 싶었지만…숫자 중심 정치적 계산법에 밀렸다”

수베디가 출마를 결심한 건 ‘당사자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이주민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데, 정치권에선 이주민 당사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제가 출마한 경기도만 봐도 인구의 5.3%가 이주민이에요. 이주민 의원이 없다는 건 5.3%의 국민 대표가 없다는 뜻이죠.” 당은 다문화위원회를 두고 종종 이주민 관련 정책을 논의했지만 그뿐이었다. 이주민인 그에게 출마를 권유하는 정치인은 당에 없었다.

장애인·여성·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당사자가 아니어도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이 수베디 눈에는 현실성을 결여한 것으로 보였다. “이주민을 대변하거나 이주민 정책에 기여하려는 정치인이 별로 없잖아요. 당사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정책과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떠올리는 정책에는 차이가 있고요.”

직전까지 그는 목사, 이주민단체 활동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처음 한국에 들어온 지난 1996년의 신분은 산업연수생이었다. 경기도의 한 비닐 공장에 취직했다가 2년 계약이 만료되면서 1998년 네팔로 돌아갔다. 한국에 있을 때 도움을 준 교회를 잊지 못해 1999년 한국에 돌아와 신학을 배웠다. 목회 사역은 경남 김해에서 시작했다. 2009년 귀화하면서 네팔 출신 일반귀화자 1호가 됐고, 2013년 ‘김해이주민의집’을 만들어 이주민 인권 운동을 본격화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다문화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지난해 3월 경기도에 올라왔다.

수베디가 출마를 준비하며 내놓은 공약엔 이주노동자로서 경험이 묻어 있었다. “이주민 대상 예산을 현실성 있게 써야 해요. 다문화 가정 지원 예산 규모가 큰데, 노래하고 춤추는 지역 행사에 꽤 많이 쓰여요. 정작 이주민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이주노동자의 정착을 위한 예산은 별로 없죠.”

농촌지역 주거 안전 문제도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이다. “지역의 노후 건물을 공공기관이 리모델링하고, 고용주나 노동자에게 사용료를 받으면 컨테이너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살지 않아도 되잖아요. 노동자는 안전해서 좋고, 지역 농부·농장주는 근로자를 구할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요.” 지난 2020년 12월 영하 20도씨에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속헹의 일터도 경기도(포천)였다.

품은 뜻이 컸지만 현실의 장벽은 그보다 더 높았다. 경기도의회 비례대표에 나선 후보에 대해 민주당은 당 추천순위 8번까지를 당선권으로 봤다. 그가 받은 순번은 12번이었다. 그는 “희망 없는 선거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선거관리위원회 후보 등록비, 당 비례대표 후보자 신청비로 이미 돈깨나 쓰고 공약 고민에 시간을 들였지만 ‘낭비’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출마를 포기하기까지 과정에서 이주민 출마를 가로막는 한국 정치의 질곡을 봤다.

네팔인 일반귀화자 1호 수베디 여거라즈(50)가 지난 4월 서울 중구 경향신문 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네팔인 일반귀화자 1호 수베디 여거라즈(50)가 지난 4월 서울 중구 경향신문 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이주민 혐오 늘어난 한국…그래도 “시작, 희망”

그는 ‘정치적 계산법’이 이주민의 정치 참여를 막는다고 지적했다. “기성 정치인들은 ‘이 사람이 나한테 도움이 될까’를 계산해요. 경기도만 해도 제가 사는 평택의 시·도의원, 위원장들은 저를 지지해줬지만, 도내 다른 지역 정치인들은 그 지역 후보를 밀어줘야 자기한테 득이 되잖아요.”

소수 대표성을 견인한다는 비례대표의 취지답게 당내 순번에서 할당을 두고 있지만 이주민에게 꼭 유리하지는 않다. 소수집단 가운데서도 규모가 크거나 조직력이 강한 집단일수록 순번 할당에서 우위를 점한다. “노동계 인사는 경선에서 그냥 붙어도 많은 표를 받을 텐데, 와중에 또 특별보호를 받아요. 예를 들면 당내 비례 순번에서 4번에 배정한다는 식이에요. 보육계나 장애계도 지역마다 단체가 많은 데다 연합이 잘 돼서 정치인들이 눈치를 봐요. 직능별 대표니, 비례니 이야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조직 싸움이 있는 거죠.”

수베디는 “일주일 전에 재밌는 일을 겪었다”며 말을 이었다. 당시 다문화·이주민 단체 활동가 20명 가량이 김동연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온다고 해서 한 자리에 모였다. 간담회도 하고 지지 선언도 할 생각이었는데, 자리에 김 후보 대신 국회의원 한 분이 왔다. “그 분이 하는 말이, ‘원래는 사모님이 참석하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지금 경기도가 아주 박빙이라 득표가 되는 곳으로 가셨다’는 거예요.”

수베디는 기자가 ‘다른 지방선거 후보자들이 낸 이주민 공약 가운데 눈에 띈 것이 있느냐’고 묻자 “못봤다”고 답했다. 모든 당, 모든 지역을 찾아보진 못했지만 ‘찾아도 별 것 없을 것’이라며 냉소했다. 국민의힘이 내놓은 지방선거 공약집에 실린 이주민 관련 공약은 ‘다문화가족 자녀, 맞춤형 지원체계 강화’가 전부이다. 야당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공약집에는 ‘결혼이주여성 체류권 보장 등 인권 보호 강화’ 한 가지 내용이 담겼다. 정의당은 ‘미등록 이주아동 권리보장’과 ‘장애, 이주, 북한이탈 여성 등 모두의 권리 보장’을 공약했다.

수베디는 각 당의 이주민 관련 공약 미비에 사회·정치적 배경이 자리한다고 봤다. 이주민 인구가 늘어나는 반대급부로 이주민을 향한 혐오가 자라났다는 것이다. “‘몇년 후면 외국인 주민이 500만명이 넘는다는데, 그럼 우리 일자리를 빼앗기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도요.”

수베디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외국인 건강보험에 대해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다’고 발언한 것을 기억했다. “이주민을 대표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고, 이주민을 싫어하는 이들의 스피커는 크니까 그런 말이 먹히는 거죠.” 그는 자신이 속한 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지난 대선 과정 내내 이주민 정책을 고민했지만 적극 발표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표심을 생각하느라, 대선 막판에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몇 줄 적은 게 전부였다는 것이다.

수베디의 시선은 다시 정치로 회귀했다. 정치는 당사자 경험에서 우러나온 정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도 중요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이주민을 ‘같은 나라 국민’으로 인식할 기회로서 또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정치는 그 나라 국민만 하는 일이잖아요. 이 말은,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사람에 대해선 ‘아, 저 사람도 우리 국민이구나’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이주민 정치인이 늘어나면 이주민도 같은 국민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수베디는 자신의 정치 도전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래 머물며 목회와 이주민 단체 활동을 이어온 경남 지역과 비교해 경기도에는 아는 사람이나 단체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시작’과 ‘희망’이란 말로 자신의 상황을 진단했다. “인연도 없는 제 얘기에 관심 갖고 들어주는 분들 덕에 희망을 봤어요. 지선이 끝나면 전당대회가 시작될 텐데, 정치인으로서 제 역할을 찾아봐야죠. 경기도 내 이주민 단체와 협력해 사회 운동도 계속 할 생각이고요.” 지방선거 출마자 수베디는 멈춰섰지만, 이주민 활동가이자 새내기 정치인의 발걸음은 오늘도 전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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