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은 한반도평화의 초석될 수 있을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각) 유엔총회 연설에서 또 한번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을 제안한 뒤 이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특히 이번에는 북한이 발빠르게 이 문제에 개입하면서 판을 키우고 있다. 2006년 처음 등장한 종전선언은 이내 사라지는듯 했으나 세월이 흐르고 정세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다시 살아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종전선언은 한국전쟁이 끝났음을 확인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정전협정 당사국 정상들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법적 구속력이 있거나 평화협정 체결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도 아니지만, 성사만 된다면 한반도 정세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관련 당사국인 남·북·미·중 모두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 임기종료를 6개월여 남긴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 카드를 다시 뽑아들고 마지막 시도에 나섰지만 이같은 각국의 입장 차이와 현재의 한반도 정세 여건을 감안하면 실제 종전선언이 가시화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2006년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힌 방안으로 종전선언 문제를 처음 협의했다./청와대 홈페이지

2006년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힌 방안으로 종전선언 문제를 처음 협의했다./청와대 홈페이지

■한·미 간 엇박자 속에 탄생한 종전선언

종전선언은 노무현 정부의 임기말 구상이다.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정세가 초긴장 상태였던 2006년 노무현 정부는 6자회담 비핵화 논의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정전협정 당사국 정상들이 모여 한국전쟁 종료를 선언하는 정치적 이벤트를 구상했다. 그해 11월 하노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다. 회담 후 송민순 당시 청와대 안보실장은 브리핑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과 안전보장 외에 ‘평화체제 관련 협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다음날 백악관 대변인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취할 수 있는 행동 리스트에 한국전쟁 종료선언도 포함돼 있다”고 밝힘으로써 ‘종전선언’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수면 위에 올라왔다.

노무현 정부의 구상은 비핵화·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 전 종전선언으로 각국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종전선언을 평화협정 체결 논의의 ‘입구’로,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실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출구’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단계별로 나눠 구분하지 않고 같은 개념으로 인식했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면 종전선언도 당연히 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미국은 “종전선언을 지지한다”는 공개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밝혔지만, 미국이 생각하는 종전선언에는 항상 ‘북한이 핵을 폐기한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다.

■미·중이 환영하지 않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종전선언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 뒤 발표한 10·4 남북공동선언에는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다른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은 남북 정상의 종전선언 추진 합의에 반발했다.

미국은 불과 한달 전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재차 촉구한 노 대통령에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검증가능한 핵폐기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음에도 남북 정상선언에 종전선언이 포함된 것에 불쾌한 기색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송민순 외교부 장관과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면전에서 “미국 정부의 방침은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게 핵을 폐기하기 전까지 종전선언을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쐐기를 박아버렸다.

중국은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이라는 표현에 불쾌감을 가졌다. 이 표현은 김정일 위원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중국의 정전협정 당사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중국은 종전선언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3자 또는 4자’라는 표현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핵심당사국인 미·중의 환영을 받지 못한 종전선언 구상은 넉달 뒤 노무현 정부의 임기 종료와 함께 잊혀졌다.

2018년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공개 회담을 하기 전 취재진 앞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하노이/로이터연합뉴스

2018년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공개 회담을 하기 전 취재진 앞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하노이/로이터연합뉴스

■부활한 종전선언, 당사국의 동상이몽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시동이 걸린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에서 종전선언이 다시 등장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번에도 미국의 입장은 여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남·북·미 정상이 만나 악수하는 장면에 대한 정치적 효과를 기대하며 잠시 관심을 표명하기는 했지만, 정책적 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종전선언에 대한 당사국들의 생각은 제각각이다.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이 북·미 대화와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재개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유엔총회 연설은 문 대통령의 4번째 종전선언 제안이다.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이 각국의 평화협정 의지를 확인하고 북한이 안심하고 비핵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미국을 대화 트랙에 묶어두려는 의도도 있다. 구속력 없는 정치적 선언이지만 정상들의 선언이기 때문에 무게감이 적지 않다. 한번 선언하면 ‘쉽게 배에서 뛰어내리기 어려운’ 효과가 있다.

미국은 종전선언-협상 시작-평화협정 체결의 시퀀스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현실은 정전체제에 머물고 있는데 정치적으로 종전을 선언해버리면 괴리감에서 오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종전선언이라는 입구를 통해 협상을 시작했는데 비핵화가 진행되지 않아 평화협정 체결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장기화될 경우 부작용은 더욱 커진다. 종전선언은 협상에서 대북군사적 옵션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어서 결코 협상에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따라서 종전선언은 비핵화 마지막 단계에서나 가능하다는게 미국의 일관된 입장이다.

북한은 종전선언에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종전선언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시작이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한국이 미국을 설득해보라는 취지였다. 종전선언을 얻기 위해 뭔가를 내주지는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북한은 북·미 협상이 진행 중이던 2018년 10월 “종전선언은 비핵화와 바꿔먹을 흥정물이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처럼 ‘조건 없는 종전선언’을 주장하는 북한과 ‘비핵화 조치에 따른 종전선언’을 주장하는 미국의 입장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어져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며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종전선언을 제안하고 있다. 뉴욕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며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종전선언을 제안하고 있다. 뉴욕 /연합뉴스

■북·미의 공통 인식은 ‘시기상조’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직후인 지난 24일과 25일 잇따라 담화를 내고 반응을 보였다. 김 부부장은 “종전선언은 나쁘지 않다”면서 “적대시를 철회한다는 의미에서의 종전선언은 흥미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적대시정책과 불공평한 이중기준이 먼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말하는 적대시정책이란 ‘생존권과 발전권을 위협하는 요소’를 말한다. 대북제재, 한·미군사훈련, 전략자산 전개, 첨단무기 도입 등이다. 이중기준이란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를 도발로 간주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김 부부장의 담화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에게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종전선언이 아니라 ‘적대시정책과 이중기준 철회’다. 종전선언에 대한 입장은 기존의 ‘조건없는 종전선언’에서 ‘적대시정책 철회해야 종전선언’으로 오히려 더 멀어졌다. 북한 문제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김 부부장의 담화에 대해 “북한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종전선언에 큰 관심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에 매달리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들의 관심사를 먼저 해결하도록 조건을 걸어놓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종전선언에 대한 북·미의 시각에 공통점도 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보문제에 정통한 전직 관료출신의 전문가는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 진전이든, 북한이 요구하는 적대시정책 철회든 종전선언을 위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면서 “종전선언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북·미 모두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활용하기보다는 주머니에 넣어둬야 할 카드”라고 지적했다.


Today`s HOT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400여년 역사 옛 덴마크 증권거래소 화재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장학금 요구 시위하는 파라과이 학생들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케냐 의료 종사자들의 임금체불 시위 2024 파리 올림픽 D-100 솔로몬제도 총선 실시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