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으로 촉발된 한국 대응의 문제점

김태훈 기자

타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의 가능한 정부 조직 필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20년 6월 19일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개관한 추모관 ‘기억의 터’에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20년 6월 19일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개관한 추모관 ‘기억의 터’에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은 모두 1154점이다. 남한에 15점, 북한에 2점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일본에는 25점의 세계유산이 있다. 세계유산 보유숫자로만 보면 11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가진 나라다. 지난 2월 1일 사도광산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천한 세계유산 후보가 되면서 이 순위에도 변동 가능성이 생겼다. 만일 사도광산이 일본의 의도대로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26점의 세계유산을 보유한 이란과 함께 세계유산 보유 순위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가 된다.

■2015년부터 사도광산 등재 움직임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위시한 자국 내 보수·우익세력들이 사도광산 등재를 추진하는 동력의 바탕이다. 10여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일본의 전략은 지금과 달랐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일본대표였던 곤도 세이이치 전 일본문화청 장관이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신청을 서두르지 말자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가장 밀접한 관계국인 한국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2015년 무렵이 되면서 일본의 전략은 크게 바뀌었다.

“2015년 일본이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추진할 때부터 사도광산 문제를 인지하고 관련 보도자료를 냈어요.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추천 잠정목록 2번이었거든요.”

당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위원회) 조사과장이었던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는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리려는 일본의 본격적 움직임을 그때 이미 간파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을 보면 먼저 각국 정부가 등재를 원하는 자국의 유산을 잠정목록에 올려야 한다. 이후 잠정목록에 등재된 유산 중 정식신청할 후보를 선정해 유네스코에 추천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를 감안하면 곤도 전 장관의 공식 언급과 달리 2007년부터 일본에선 내부적으로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사도광산은 2010년 처음으로 일본 잠정목록에 올랐다. 정 대표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강제동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화유산일지라도 어두운 역사까지 함께 조명하면 반대가 없을 텐데, 적어도 일본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던 기회를 놓쳤으니까.” 옆 나라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두고 그때그때 대응할 게 아니라 강제동원 문제 전담 상설기구 설치 등 근본 대책 마련에 나섰다면 좀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선제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다.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같은 기관 있어야

줄여서 부르는 약칭은 강제동원위로 같지만 먼저 존재했던 강제동원 문제 전담기구는 사실 명칭이 달랐다. 2004년 첫 출범 당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라는 간판을 달고 시작했다. 활동기간이 한시적인 기구로 출발했고 이후 명칭 개정과 함께 활동기간을 연장한 뒤에도 시한부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 국권을 침탈한 옆 나라가 침략의 역사를 교묘히 위장하는데도 체계적인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건 전담기구의 부재 탓이 컸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전쟁과 식민지배 피해 당사국인 한국에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같은 기관이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들어 이스라엘 정부가 나서 만든 이 기관은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에 걸맞게 피해사실 조사와 희생자 발굴 및 지원 등의 업무를 전담하는 상설기구로 탄생했다. 강제동원위원회에서 조사과장과 심사과장으로 근무한 허광무 박사는 정부 조직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로 타국 정부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과 논의를 이끌어야 하는 특성을 들었다.

허 박사는 “국내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쟁점이 있는 사안이라도 중립적인 재단 같은 기관을 통해 해결할 수 있겠지만, 강제동원은 줄곧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를 상대해야 하니 민간 차원에서는 어렵다”고 말했다. 학계나 시민사회 등 민간 차원에서는 일본 내부의 ‘양심적’ 세력이 한국 측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관계가 유연하지만, 일본 정부와는 논의의 출발점 자체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허 박사는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창설한 기구 또한 일본 정부와 갈등만 유발해서는 안 되고, 조사를 거쳐 확인한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전해 일본 내부의 여론 역시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쪽이 최선”이라며 “무엇보다 국가가 자국민이 겪은 피해에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역사왜곡 문제 발생할 수도

이게 끝이냐는 문제도 남는다.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하시마섬을 비롯해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소개하는 세계유산, 그리고 역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사도광산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역사왜곡 문제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서다. 현재로선 일본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가운데 침략전쟁이나 강제동원 문제와 얽힌 역사적 유산이 더 이상은 없다. 언제든 잠정목록에 올린 뒤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대상으로 의심할 만한 후보들은 몇 군데 있다.

정 대표는 “도야마현 구로베가와 발전소가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쓰비시가 전쟁 시기에 만든 지하 군수공장 50여곳을 포함 일본 전국 2000여곳에 굴을 파고 만든 지하 공장들도 근대 산업유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언제든 왜곡된 역사를 홍보하기 위한 공간으로 전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나마 우리는 일본과 수교를 맺은 국가여서 관계를 바로잡기만 하면 논의가 가능하다. 미수교국인 북한은 일본에서 나오는 역사 자료를 전혀 활용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를 전담하는 기관이 있고 장관급 인사를 수장으로 두고는 있지만 자료와 접촉 채널의 한계 때문에 피해 조사에서부터 수십년째 큰 벽에 가로막혀 있다. 일본에서 발굴한 자료뿐 아니라 고향이 북한인 피해자의 유골조차 봉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 대표는 “강제동원 당시의 피해자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피해자들이니 피해자 조사와 추모는 결국 남북한이 함께해야 한다”며 “일본 육군 조병창처럼 남한의 인천과 북한의 평양에 각각 남아 있는 동일한 성격의 역사 유산을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면 일본과는 달리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선도적 역할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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