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감 없는 대일 인식’ 드러낸 3·1절 기념사···강제징용 해법 발표 염두에 둔 듯

유신모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출범 이후 처음 맞는 3.1절에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념사를 내놨다. 원고지 6매 정도의 짧은 분량에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고 양국 관계의 미래와 협력만을 강조했다.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번 3.1절 기념사에는 역대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균형감 없는 대일 인식’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한·일 과거사 문제와 한·일 협력을 이야기할때 역대 모든 정부의 입장은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위해 협력한다’는 것이었다. 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역사적 현실 그대로 직시해야만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번 윤석열 정부의 기념사에서는 일본이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생략돼 있다. 서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사라진 것이다.

윤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며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하다”고 말한 것도 선후가 바뀐 역사 인식을 드러낸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에는 우리의 잘못도 있다는 점을 말하려면, 국권을 침탈한 일본의 잘못을 먼저 언급했어야 하지만 이를 생략했다. 이 때문에 ‘우리도 잘못했다’는 반성이 아닌, ‘우리가 잘못했다’는 자학이 3·1절 기념사의 주요 내용이 되버렸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분명한 언급없이 한·일관계의 미래와 협력을 강조하다 보니 이번 3·1절 기념사는 결국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포함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는 것이 104년 전 선열들이 외친 3·1 정신과 다르지 않다는 기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윤석열 정부가 이처럼 전례없이 균형감 없는 3.1절 기념사를 내놓게 된 배경에는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조급함이 드러나 있다. 특히 현재 한·일 간 최대 현안인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시급히 풀어야 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한·일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집중적인 외교협의를 가졌으나 핵심 쟁점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국내 기업의 기부금을 모아 피해자에게 대신 배상하는 ‘제3자 변제’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일본 피고기업들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정부 차원의 해법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말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서울 방문해 비공개 협의를 가졌을때도 일본의 태도는 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기념사는 정부가 일본 피고기업의 참여없이 국내기업의 기부금만으로 배상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의 해법 발표가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인 것으로 보인다. 한·일 간 강제징용 해법 논의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정부는 조만간 일본 피고기업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하지 않는 해법을 발표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이번 기념사에서 강제징용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한·일 협력의 당위성만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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