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피고 기업 대신 국내 재단이 국내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조성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제3자 변제안을 6일 공식 발표했다. 정부안에서 역대 정부가 추진해온 ‘일본 피고 기업의 배상 참여’는 빠졌으며, 일본의 사과도 이전 내각들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간접사죄’ 형식으로 이뤄졌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정부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야당은 “외교참사”라며 정부안 철회를 요구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8년 3건의 대법원 확정판결 원고들에게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현재 계류 중인 관련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에도 역시 판결금 등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그동안 일본과 협의 과정에서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측의 적절한 사죄 표명과 일본 피고 기업들의 기부금 조성 참여 등 ‘성의있는 호응’을 촉구해왔다. 하지만 박 장관은 이날 회견에서 일본 측이 취할 조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박 장관은 “한·일 양국이 1998년 10월에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총리와의 주례회동에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오늘 강제징용 판결 문제의 해법을 발표한 건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밝혔다.
박 장관은 일본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한·일관계의 미래 지향적인 발전을 위해서 양국 경제계가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 양국은 재계를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미래청년기금’(가칭)을 공동으로 조성해 운영하는 방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기금에 일본 피고 기업은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장관은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가 없는 ‘반쪽 해법’이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물컵에 비유하면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고 생각을 한다”면서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피해자 의견 수렴이 미흡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진정성 있는 자세로 성실히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지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한국 정부안 발표와 관련해 “역사 인식에 관해서는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승계해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은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는 것으로 평가한다”면서 “이번 발표를 계기로 정치, 경제, 문화 등 분야에서 교류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본 피고 기업의 재단 기부에 대해서는 “특별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일본 정부가 그간 표명해온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을 평가한다”고 밝혔다.
미국도 즉각적인 환영의 뜻을 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의 발표에 관한 성명’을 통해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협력과 파트너십의 새롭고 획기적인 장을 열었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배상 확정판결 피해자의 지원단체와 대리인단은 정부 해법에 대해 “한국 행정부가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생존 피해자 3명은 모두 정부 해법에 반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강제징용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잘못한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사죄를 하고 배상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며 정부 발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정권이 역사 정의를 배신하는 길을 선택했다”며 “이는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을 짓밟은 2차 가해이자 대법원 판결과도 배치되는 폭거”라고 비판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누구도 이해 못 할 또 하나의 외교 참사”라고 말했다. 민주당과 정의당 및 무소속 등 53명으로 구성된 ‘일본의 강제동원 사죄 및 전범 기업 직접 배상 촉구 의원모임’은 규탄 성명서를 내고 정부안 철회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