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 변제’ 법적 다툼 불가피···‘피해자 권리’ 외면한 윤석열 정부읽음

김혜리 기자    이혜리 기자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식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을 핵심으로 한 해법을 공식 발표한 6일 역사 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 소속 활동가들이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긴급 항의 행동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식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을 핵심으로 한 해법을 공식 발표한 6일 역사 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 소속 활동가들이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긴급 항의 행동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정부가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해법으로 제시한 ‘3자 변제안’은 새로운 법적 다툼의 불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피해자 동의 없이 ‘제3자’인 한국 정부가 마음대로 배상하는 게 가능한지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정부가 국제인권법적으로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피해자 중심적 접근’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피해 당사자 반대하면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변제 못 해”

정부 대책은 2018년 대법원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미쓰비시중공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 재단이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포스코 등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수혜를 입은 국내 기업의 기부를 받아 재원을 조달하겠다고 했다. 피해자 측의 승소가 확정된 뒤 강제집행 절차를 밟고 있는 3건의 피해자 14명이 대상이다.

핵심 쟁점은 피해자 동의 없이 제3자인 국내 재단이 일본 기업의 채무를 대신 변제해줄 수 있느냐다. 민법 제469조1항은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데,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이를 허용하지 않는 때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근로정신대 소송을 대리한 김정희 변호사는 “해당 조항은 피해자가 제3자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수 없다고 밝히면 제3자가 일방적으로 변제하지 못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크다”고 했다.

피해자들이 거부해도 재단이 일방적으로 배상금을 법원에 공탁해 채무관계를 소멸시키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공탁이 유효성을 두고 또다시 법적 다툼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 불인정, 국가폭력에 대한 피해 배상이라는 사건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법원이 재단의 공탁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게 피해자 쪽 입장이다.

특히 손해배상 소송의 피고는 일본 기업이지만, 이들이 재단 출연에 참여하지 않는 게 문제로 지적된다. 이렇게 되면 채무의 본질이 달라진다.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본 기업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이 사건 채무의 성질은 통상의 손해배상 채무와 다르기 때문에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며 “공탁을 한들 무효인 공탁이기 때문에 채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 브리핑룸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해법 발표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 브리핑룸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해법 발표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당장 원고 대리인단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추가 집행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부 대책은 법원이 심리 중인 66건(원고 1139명)에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인정한 강제동원 피해자는 21만명 규모라 파장은 더 커질 수 있다. 정작 대법원은 본안 판결 이후 5년이 지났는데도 집행절차를 확정하지 않고 있다. 원고 대리인단은 “대법원이 외교적 교섭을 이유로 판단을 미뤄왔다면 이제 신속한 매각결정을 확정해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 권리’ 빠진 정부안, 국제 인권규범·대법원 판례와도 대치

이번 정부 대책에서 ‘피해자 권리’가 빠진 것도 법적 문제가 될 수 있다. 국제인권 규범들은 ‘피해자 권리’, ‘피해자 중심적 접근’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유엔이 1948년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헌법·법률이 부여한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권한 있는 국내법정에서 실효성 있는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유엔은 1985년 ‘범죄와 권력남용의 피해자를 위한 정의에 대한 기본원칙 선언’, 2005년 ‘피해자 권리 기본원칙’을 채택해 피해자 권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 규범들이 규정하는 피해자 권리에는 금전적 배상뿐 아니라 가해자의 사실과 책임 인정, 사과, 재발방지 보장 등이 포함된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피해자들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이 같은 피해자 권리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헌재는 당시 결정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겪은 피해에 상응하는 완전하고 효과적인 피해의 회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중요함에도 (한·일 정부의 합의 과정에) 피해자 의견수렴이 부족했다”며 “피해자들이 합의로 인해 받은 고통이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당시 헌재는 합의 내용이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라며 각하 결정을 했지만, 이번 정부 대책은 공권력이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손해배상 청구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헌법소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가 주도한 재단에 국내 기업들이 출연하는 게 ‘자발적 기부’가 맞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정당한 명분 없이 출연을 하고 구상권도 행사하지 않는다면 형법상 배임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김제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본래 민사사건은 판결이 나오면 강제집행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권리 실현은 막고 모아주는 돈을 받아가라는 것은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사법부가 역사적인 사건에서 고뇌에 찬 결단을 했는데 행정부가 한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은 삼권분립 측면에서도 문제”라고 했다.

일본 기업과 싸우고 이겼더니…‘대한민국 정부’라는 산

정부가 ‘해법’이라고 내놓은 대책으로 인해 오히려 법정 싸움이 길어지면 결국 또 피해자들이 더 고통받게 된다. 김정희 변호사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오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법률 다툼이 마무리됐는데, 이제 피해자는 대한민국 정부와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로 다시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며 “피해자로서는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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