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대일 우선 양보’ 외교…내년 ‘과거사 청산’ 선언 우려도

정희완 기자

‘물컵론’으로 상징되는 대일 외교 기조에

‘강제’ 표현 빠진 일본 사도광산 전시물 용인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 등 양보만 계속

과거사 대하는 일본 태도는 변하지 않아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활동가들이 지난 7월31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부정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의 대일 굴종외교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문재원 기자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활동가들이 지난 7월31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부정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의 대일 굴종외교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는 이른바 ‘물컵론’으로 대표된다. 정부가 먼저 물컵의 절반을 채우면, 일본이 나머지 절반을 보탤 것으로 기대한다는 뜻이다. 정부는 ‘굴종 외교’라는 비판에도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관련 ‘제3자 변제안’을 내놓는 등 각종 선제적 양보에 나섰다. 그러나 역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친일 외교’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의 이런 기조는 최근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한·일 간 협상 결과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가 등재에 찬성하는 조건으로 받아낸 일본의 조치가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외교부가 앞장서서 일본 당국자 발언을 왜곡해 전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한·일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인식하면서,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일본과 ‘과거사 청산’에 합의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지난달 27일 일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키로 결정했다. 한국을 비롯한 모든 위원국이 동의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일본과 협상 끝에 일본이 사도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노동자의 가혹한 노동환경을 보여주는 전시물을 선제적으로 설치했다고 밝혔다. 2015년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때 일본이 강제동원을 설명하는 전시물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진전된 조치라고 정부는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물에는 정작 ‘강제동원’이나 ‘강제노동’ 등 강제와 관련한 명시적인 표현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 피해자의 증언 없이 객관적 사료와 설명 문구만 나열돼 있어 시각에 따라 자발적 노동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또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이 쓰인 점도 문제로 꼽혔다. 이는 일본이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강제성을 희석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다. 전시물에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입장이 투영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외교부의 사후 대응도 논란을 키웠다. 외교부는 애초 ‘일본에 강제 표현을 요구했는지’를 두고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그러다 지난 6일에서야 국회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전시 내용에 강제라는 단어를 담을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나아가 조선인 피해자 증언의 전시도 일본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성을 나타낼 수 있는 핵심 사항은 모두 양보한 채 사도광산 등재에 찬성한 것이다.

또 외교부가 세계유산위원회에 참석한 일본 측 대표의 발언을 임의로 수정한 사실도 도마 위에 올랐다. 외교부는 보도자료에서 일본 측 대표가 “일본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처했던 가혹한 노동환경과 그들의 고난을 기리기 위한 새로운 전시물을 사도광산에 이미 설치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발언의 원문에는 ‘한국인 노동자’가 아닌 ‘모든 노동자’로 나와 있다. 일본 측 발언을 왜곡 전달해, 정부 성과를 부풀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사도광산 사태는 정부가 그간 보여준 대일 외교 흐름에 비춰 예견된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에 집중하면서 과거사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다. 정부가 지난해 3월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관련해 ‘제3자 변제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게 대표적인 예다.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구상인데, 일본 기업의 참여가 없어 ‘반쪽 해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정부는 제3자 변제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변제 공탁’까지 강행했으나 법원에서 잇따라 기각당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한·일 정상회담 직전에 <2023년 일본개황>을 발간하면서 기존판에는 담겼던 일본의 ‘역사 왜곡 및 과거사 반성’ 발언 사례 248개를 통째로 삭제했다. 정부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문제를 놓고도 일본의 입장을 두둔했다.

이런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외교청서와 교과서 등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강제동원을 인정하지 않는 등 왜곡된 역사 인식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국회의원들이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집단 참배하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곳에 공물을 봉납하고 있다.

게다가 앞으로도 정부의 대일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나아가 정부가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일본과 과거사 문제를 아예 정리할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도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내년 양국 정상이 미래지향적인 약속을 담은 공동문서 발표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명했다고 지난 3월 교도통신이 보도한 바 있다.

일본군위안부연구회 회장을 지낸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양국 정상이 과거사 청산을 못 박는 내용의 공동선언을 추진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라며 “최근 역사 관련 단체의 장에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을 임명하고 있는 것도 과거사 청산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를 두고 “여러 현안이나 과거사가 걸림돌이 될 수는 있지만, 확고한 목표 지향성을 가지고 인내할 것은 인내하면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성명서를 내고 “식민지배를 당한 피해국 대통령이 치유되지 않은 일본과의 지난날 아픈 역사를 한·일관계에 ‘걸림돌’이라고 한다면 이게 제정신인가”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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