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부인, ‘국모 이미지’로부터 해방시킬 때

김지환 기자

사실상 공직자로서 활동하지만

지위·역할 등에 대한 법적 근거 취약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인도를 방문하기 위해 2018년 11월 4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2호기에 올라 출국인사를 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인도를 방문하기 위해 2018년 11월 4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2호기에 올라 출국인사를 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잘 보이려고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돌이켜보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 잘못이고 불찰입니다.”(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부인 김건희씨)

“공직자의 배우자로서 모든 점에 조심해야 하고 공과 사의 구분을 분명히 해야 했는데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특히 제보자 당사자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부인 김혜경씨)

제20대 대통령선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선후보의 배우자가 여론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퍼스트레이디’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 모두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김건희씨는 허위이력 기재·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 김혜경씨는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에 휩싸여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과 부인 이희호 여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과 부인 이희호 여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통령 부인은 어떤 자리인가

지난해 말 윤석열 후보의 ‘청와대 제2부속실 폐지’ 공약도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허위경력 기재가 대선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집권 시 김건희씨의 역할을 선제적으로 축소하는 모양새를 통해 논란에 선을 그으려 한다는 관측이 나왔다. 윤석열 후보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와 별개로 이 공약은 그간 관행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돌아보게 하는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해외순방을 떠나는 대통령은 성남 서울공항에서 ‘1호기’에 타기 전 돌아서서 손을 흔든다. 대통령 옆자리엔 비서실장이 아닌 대통령 부인이 ‘항상’ 함께 서 있다. 한국인들이 대통령 부인의 존재를 떠올리는 대표적 장면이다.

대통령 부인은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동행할 뿐 아니라 대통령을 대신해 외교활동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2018년 11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공식 초청을 받고 3박4일 일정으로 인도를 방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도 2002년 5월 대통령을 대신해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정부 수석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대통령 부인은 대통령이 불가피하게 참석하지 못하는 국내 행사에도 참석한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선출한 대상은 대통령이지만 대통령 부인도 사실상 ‘공직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 부인은 청와대 관저에서 대통령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참모’로 불리기도 한다. ‘대통령 부인은 대통령의 귀를 가지고 있다’는 영어식 표현도 있을 정도다.

청와대 비서실에는 대통령 부인의 업무를 담당하는 제2부속실이 있다. 문재인 정부에선 비서관을 포함해 4명가량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는 2부속실의 구체적 업무를 대통령 부인 일정 및 행사 기획·집행, 대통령 부인 활동 수행 및 비서업무, 대통령 부인 활동 대내외 네트워크 및 비서활동, 관저생활 보좌 등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 부인에게 어느 정도의 예산이 들어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국회는 국정감사 때마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제2부속실이 사용한 예산내역’을 요구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대통령비서실 및 국가안보실 세출 예산에 제2부속실 소관 편성 항목은 따로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대통령 부인과 관련된 예산은 어디에서 나올까.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2부속실장을 지낸 민주당 전재수 의원은 기자와 통화하면서 “참여정부 당시엔 청와대 특수활동비와 여사님이 참여하는 행사를 관할하는 부처의 예산 등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특수활동비 투명성 요구가 높아지면서 대통령 부인 관련 예산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월 10일 문재인 정부가 비공개하기로 했던 청와대 특수활동비와 김정숙 여사의 의전 비용 등을 공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국민의 알권리와 청와대 여러 업무의 특수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부인은 사실상 공직자로서 활동하지만 그 지위, 역할 등의 법적 근거가 취약하다.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제4조가 ‘대통령과 그 가족(배우자와 직계존비속)’을 경호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령인 ‘대통령비서실 직제’에도 제2부속실을 포함한 하부 조직과 담당 업무는 비서실장이 정한다고 돼 있을 뿐 구체적 내용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이번 대선에선 이례적으로 제2부속실 존폐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윤석열 후보는 공약집에서 2부속실 폐지 공약을 재확인했다. 이재명 후보는 “제2부속실을 투명하게 운영하며, 대통령 배우자의 국민 통합과 국제 외교활동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페이스북 갈무리

힐러리 클린턴 / 힐러리 클린턴 페이스북 갈무리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대통령제 역사가 긴 미국은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공식화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연방법에 명확한 법적 근거가 있다. 연방법은 “대통령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데 대통령의 배우자가 대통령을 지원하는 경우 대통령에게 부여되는 지원 및 서비스가 대통령의 배우자에게도 부여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 부인은 법적으로 ‘관료’에 해당한다는 판례도 있다.

미국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한 대통령 부인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힐러리는 대통령 부인으로서는 미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 윙’에 자신의 사무실을 마련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3년 집권 뒤 ‘국가 의료제도 개혁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부인인 힐러리가 TF를 이끌도록 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대통령 부인이 과도하게 국정에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힐러리의 의료개혁 활동은 법정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의사협회 등은 연방 자문 위원회법(FACA)에 따라 TF 회의를 일반에 공개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법은 연방정부의 상근 공무원이나 직원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경우에만 회의를 비공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힐러리는 관료가 아니기 때문에 예외조항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는 게 의사협회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힐러리를 ‘관료’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의료보험 개혁은 민간보험 업계와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됐고, 이는 1994년 민주당의 중간선거 패배에도 영향을 미쳤다. 힐러리의 존재감으로 클린턴 행정부 당시 ‘공동 대통령(co-president)’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부인이 개인적 관심에 따라 추진하는 사업을 ‘펫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힐러리를 제외하면 첨예한 정파적 이슈를 다룬 인물은 없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가 이끈 아동비만 퇴치 캠페인인 ‘렛츠 무브(Let’s Move)’가 대표적인 펫 프로젝트로 꼽힌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은 불법 마약 추방을 위한 캠페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는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은 ‘커뮤니티 칼리지’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역할도 수행 중이다. 미국 대통령 부인이 직업을 유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말이다. “미국처럼 여성의 정치참여가 상대적으로 활발한 사회에서도 퍼스트레이디가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정치적 이슈를 끌고 갈 때 거부감이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퍼스트레이디가 추진하는 사업은 아동 비만, 환경 등과 같이 여야를 초월한 보편적 이슈들이 대부분이다.”

미국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퍼스트레이디로 꼽는 엘리너는 남편과 정치적 동반자 관계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여성, 인권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했고 남편의 별세 후에도 유엔 주재 대표로 활동하면서 세계인권선언의 기초에 관여했다.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1957년 미국 유학 시절 엘리너를 만났던 기억을 적었다. “그와 악수하던 손의 따뜻한 감촉이 생생하다. 나는 유엔 세계인권선언을 주도했던 그를 존경했으므로 뜨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 그룹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이였다.”

독일 메르켈 전 총리의 남편 요아힘 자우어 훔볼트대 화학과 교수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5년 메르켈의 총리 취임식 때 그는 직장인 훔볼트대에서 TV로 취임식을 지켜봤다. 지난해 6월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환영식 때 그가 참석하자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되는 내각제와 선거를 거치는 대통령제의 차이를 고려한다 해도 독특한 모습이다.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너 루스벨트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너 루스벨트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통령 부인의 역할은 어디까지

대다수의 한국인이 선호하는 대통령 부인의 상은 대통령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사회 소외계층을 만나고, 아동·여성·장애인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습에 아직은 가깝다. 여기에다 역대 대통령 부인들이 권력형 비리 의혹에 휘말린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대통령 부인을 향한 의심 섞인 눈초리도 여전하다. 청와대 역시 이런 여론, 국민정서 때문에 대통령 부인의 활동을 계획할 때마다 ‘자기 검열’을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 관계로 평가받은 이희호 여사는 국민의 정부 당시 여성부 출범, 남녀차별금지법 제정 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99년 옷 로비사건과 2002년 최규선 게이트에 휘말리면서 이 여사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됐다. 이 때문에 의미 있는 ‘퍼스트레이디 롤모델’이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통령 부인이 전통적인 성역할에 묶여 대통령을 내조하며 조용한 행보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최소한의 공감대는 한국사회에도 형성돼 있다. 문제는 대통령 부인이 선출된 권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적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외교’ 등 최소한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활동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법적 근거를 만들거나 사회적 토론을 거쳐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공식화하고 견제를 받도록 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의견은 그래서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주적 정당성은 반드시 선출직에게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절차에 따라 역할을 하면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는 인구학적 그룹이 주로 상대적으로 고령의 남성인데 이들의 관심사, 인적 네트워크가 제한돼 있을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이 정책을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을 가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통령 부인의 역할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과 함께 사는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과 대화를 하면서 당연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이걸 막을 수도 없다”며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대통령 부인 활동의 법적 근거를 만들거나 공식화하는 게 더 나은 접근법”이라고 했다.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공식화한다면 바람직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의 말이다. “역할이나 권한에 법적 근거를 부여한다 해도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는 개인 특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바람직한 상을 규정하는 건 활동 범위 축소로 이어진다. 대통령 배우자가 주체적 의식을 갖고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 제기도 있다. ‘대통령 부인의 역할’ 개념은 ‘남성 대통령’이라는 고정 관념을 깨지 않는 한 크게 바꾸기 어렵다는 문제 인식이다. 예술사회학자인 이라영 작가의 말이다.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의 상을 논의하기 전에 짚고 싶은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남성이 권력을 갖는 게 정상이라는 인식을 깔고 들어가기 때문에 아무리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어떻게 하자고 논의를 해도 ‘권력은 남성, 여성은 내조’라는 큰 틀에서 결국 벗어날 수가 없다. 한계가 있다. 배우자가 없는 대통령, 여성 대통령, 동성애자 대통령 등이 줄줄이 나오면서 기존의 틀을 깨는 게 필요하다.”

논란이 분분하지만 법적 근거가 취약한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을 놓고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이 각종 의혹으로 이미 큰 상처를 입었다는 점은 분명 장애물이다. 그럴수록 수면 위로 이 논의를 자꾸 꺼내고 공론을 모아가야 한다. ‘자애로운 국모’ 이미지에서 대통령 부인을 놓아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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