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제 도입 15년…여전히 ‘로또 교육감선거’

정희완 기자

저조한 투표율에 특정 번호 줄당선 되기도

투표용지 변화에도 ‘묻지마 투표’ 현상 여전

2012년 11월 26일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열린 서울시교육감재선거의 투표용지 게재 순위 추첨에서 문용린 후보가 번호를 뽑고 있다.  / 강윤중 기자

2012년 11월 26일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열린 서울시교육감재선거의 투표용지 게재 순위 추첨에서 문용린 후보가 번호를 뽑고 있다. / 강윤중 기자

2010년 5월 경기도교육감선거에 출마한 후보 4명이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에 모였다. 투표용지에 이름 기재 순서를 결정하는 추첨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정진곤 후보 측이 첫 번째 추첨자로 나섰다. 결과는 4번째, 맨 마지막이었다. 정 후보 측 관계자들은 한숨을 내쉰 반면 다른 후보 측은 기뻐하거나 안도했다. 강원춘 후보가 1번을 뽑자 주변에선 마치 당선이나 된 듯 박수와 환호가 나왔다. 투표용지 앞 순위에 이름을 올리면 득표에 유리한 이른바 ‘기호 프리미엄’을 기대한 반응이었다.

교육감선거의 실태를 응축한 상징적인 장면이다. 주민 직선제를 도입한 지 15년이 흘렀다. 여전히 ‘묻지마 투표’, ‘줄투표’, ‘로또 선거’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왜곡된 투표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각종 대책을 마련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인 ‘무관심’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대통령 후보따라 ‘줄투표’

교육감은 과거 대통령이 임명하다가 1991년부터 간접선거로 선출했다. 시·도교육위원회가 무기명 투표를 통해 후보를 써내면 최다 득표자를 교육감에 임명하는, 이른바 ‘교황 선출’ 방식이었다. 1997년부터 학교운영위원회 대표(학교당 1명) 97%와 교원단체 추천인 3%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교육감을 뽑았다. 2000년 들어 학교운영위원 전원이 투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간선제는 대표성이 떨어지고 학연·지연 중심의 조직선거나 금권선거 등 비리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교육의 자치 및 전문성 강화라는 요구까지 맞물려 2006년 직선제를 도입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교육감 후보 추천은 금지했다. 후보 자격도 ‘후보자 등록 시작일 이전 2년(현재는 1년) 동안 정당의 당원이 아닌 사람’으로 제한했다.

첫 직선제 선거는 2007년 2월 부산에서 시행됐다. 투표율이 15.3%에 그쳤다. 2008년 서울시교육감, 2009년 경기도교육감 선거도 투표율이 각각 15.5%, 12.3%에 불과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에 비해 선거비용은 수십억원 이상 들어 논란이 됐다.

2007년 충북, 울산, 경남, 제주 등 4개 지역의 교육감선거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모두 기호 2번 후보가 당선됐다. 교육감선거의 기호는 후보 이름의 가나다 순서대로 배정한 터였다. 기호가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 다른 선거와는 달리 정당이나 후보의 정치적 성향을 상징하지 않는 것이다. 주목할 대목은 해당 교육감선거가 제17대 대통령선거와 함께 치러졌다는 점이다. 당시 대선에서 기호 2번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참여정부 심판론’을 등에 업고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이 후보에 기표한 많은 유권자가 교육감선거 투표용지에도 기호 2번을 찍은 ‘줄투표’가 이뤄진 거란 분석이 나왔다. 유권자들이 교육감 후보도 정당에서 공천한 것으로 오인했을 것이란 얘기다. 교육감 후보의 인식률과 관심이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로또 선거’라는 비판이 나왔다. 일부 교육감 후보 측은 선거운동 기간 중 한나라당과 같은 하늘색 계통으로 복장을 맞춰 입기도 했다.

현행 순환배열 방식의 교육감선거 투표용지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공

현행 순환배열 방식의 교육감선거 투표용지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공

■방사형 투표용지 어떨까

2009년 국회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교육감 후보 이름을 둥글게 배치하는 방사형 투표용지 도입을 검토했다. 투표용지 이름 순서가 당락을 가르는 불공정을 최대한 방지하자는 취지이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인쇄의 어려움, 수작업 개표로 인한 인력·예산 증가, 개표 시간 지연, 기표란이 좁아져 무효표 증가 우려, 선거인 혼란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따라 국회는 방사형 투표용지 도입 대신 투표용지에서 후보자 이름만 표시하고 기호는 없애기로 했다. 이름 기재 순서는 추첨으로 결정키로 했다. 2010년 6월 제5회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교육감선거부터 적용했다.

그러자 추첨에서부터 투표용지 순서에 따라 후보자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촌극이 벌어졌다. 기호는 사라졌지만 앞 순위 후보가 득표에 유리한 구조라고 인식했다. 투표용지 상단에 ‘교육감선거는 정당과 관련이 없습니다’라는 문구도 넣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당시 교육감선거에서 당선자 16명 중 투표용지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린 후보가 6명(37.5%)으로 가장 많았다. 또 2012년 서울시교육감 재선거에서 전체 투표수 중 무효가 14%에 달했다. 유권자들이 투표용지가 인쇄된 이후 사퇴한 첫 번째 순위 후보에게 대거 기표한 게 원인으로 꼽혔다.

방사형 투표용지 도입이 교육감선거의 공정성·신뢰성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재차 거론됐다. 2013년 9월 박인숙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이런 내용의 교육자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도 관련 내용을 논의했다. 선관위는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도 도입한 사례가 없다”라며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

2013년 9월 박인숙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제안한 교육감선거 투표용지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공

2013년 9월 박인숙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제안한 교육감선거 투표용지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공

국회는 결국 2014년 2월 후보자 이름을 가로로 배열하고, 기초의원 선거구마다 이름의 배치 순서를 달리하는 ‘순환배열’ 방식을 시행키로 했다. 이 방식이 효과를 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선관위가 2014년 12월 발간한 학술지 ‘선거연구 5호’에 실린 ‘투표용지의 순서효과, 기호효과, 후광효과’(김범수) 논문이다. 2014년 6월 서울시교육감선거에 출마한 후보 4명이 159개 선거구에서 얻은 표를 분석한 결과, 후보들 모두 첫 번째 순위에 이름이 기재된 선거구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나타냈다. 후보 전체 득표율보다도 높았다. 이름 기재 순서가 뒤로 갈수록 득표율은 대체로 낮아졌다.

논문은 “순환배열 방식을 도입해 순서효과의 득표 이득이 후보 4명에게 공평하게 배분됐다”라며 “후보자 간 공정한 선거 경쟁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반대로 ‘묻지마 투표’, ‘줄투표’ 현상이 여전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대선보다 중요한 교육감선거”

이번 교육감선거 분위기도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교육감선거는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시민적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문제”라며 “교육 관련자들만의 선거라거나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한 선거로만 보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대선이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보다 훨씬 중요한 게 바로 교육감선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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