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대회 결의안 발표 후 김두관·이상민 의원 등 발의
[주간경향] “김대중, 노무현, 허대만의 꿈.” 지난 10월 5일 더불어민주당 경북도당은 국회에서 ‘선거제도 개혁 어떻게 해야 하나’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발제를 맡은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을 꿈꿨던 민주당의 정치인들을 소개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최고지도자로서 확실한 신념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6월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이야기하며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에 선거제도 개혁의 화두를 던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고 명확하게 밝혔다.”
하승수 대표는 지난 8월 22일 세상을 떠난 고(故) 허대만 전 경북도당위원장이 지난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SNS에 남긴 글도 소개했다. 허 전 위원장은 거대양당의 ‘공천 나눠먹기’로 무투표 당선자가 500명에 달하는 사실을 짚은 기사를 공유하고 “선거제도가 문제다. 현행 선거제도는 지역구도를 강화할 뿐이다. 개인의 결단과 희생으로 극복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허 전 위원장은 1995년 전국 최연소로 제2대 포항시의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지역주의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낙선하면서도 포항에서 꾸준한 정치활동을 해왔다. 하승수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은 당을 떠나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라면 자기의 숙명적인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방선거 중대선거구제 도입 추진
민주당을 상징하는 정치인들이 누차 ‘선거제도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지만, 민주당은 이들의 뜻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선거제도 개혁은 선언적 수준에 그치거나 그나마 선거를 앞두고 후퇴했다. 20대 대선을 앞둔 지난 2월 27일, 민주당은 국회에서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다당제와 정치개혁을 찬성하는 정치세력은 모두 함께하자”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결의문에는 위성정당을 방지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지방선거 3인 이상 중대선거구제 도입 입법 추진 등 비례성을 강화한 선거제도 개혁 공약이 담겨 있었다. 이를 이행할 구체적인 안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방선거에서 중대선거구제 전환은 제한적 수준에 머물렀다. 일부 지역에서는 2인 선거구제가 오히려 늘었다. 2020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나 당시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이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하자 더불어민주당도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해 비판을 받았다. 21대 총선 결과 거대 양당구도는 더 심화됐다.
지난 8월 28일 열린 전당대회를 전후해 민주당에서 선거제도 개혁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지난 7월 17일 이재명 의원은 당대표에 출마하면서 “비례민주주의 강화, 위성정당 금지, 국민소환제, 의원특권 제한, 기초의원 광역화 등 정치교체를 위한 정치개혁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8월 28일 열린 전당대회에 93.72%의 찬성률로 통과된 ‘국민통합 정치교체 결의안’에는 내년 4월까지 선거법을 개정하고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는 제도 개혁을 마무리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내년이 선거가 없는 해인 만큼 2024년 총선 전 선거제도 개혁을 할 적기라는 판단이다. 민주당의 선거제도 개혁 약속이 이번에는 지켜질 수 있을까.
더불어민주당은 10월 국정감사가 끝나는 대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적극적으로 논의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 당내 공론화 및 의견수렴 기구를 설치할 예정이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당대표와 지도부에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한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공론화 및 의견수렴 단위를 가동하자고 요청했다”며 “돌아보면 늘 선거를 앞두고 정개특위를 구성했는데 민감한 문제, 쟁점이 많은 문제는 합의를 못 하고 작은 사안들만 합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치를 바꾸기 위해 과감하게 우리의 기득권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지를 포함한 논의에 접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정치개혁법 법안 발의도 이어졌다. 지난 9월 1일 김두관 의원은 ‘허대만법’이라고 불리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국회 의석을 6개 권역별로 인구비례에 따라 나눈 뒤, 정당득표율에 따라 비례의석을 배분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이 골자다. 비례성 원칙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면 영호남 특정 지역에서 일당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지역주의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10월 4일에는 이상민 의원이 국회의원 중대선거구제 도입과 비례대표제 확대를 뼈대로 하는 정치개혁 법안들을 대표 발의했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에는 현행 소선거구제를 4~5인 중대선거구제로 바꾸고, 비례대표 의원수를 대폭 확대하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253석인 지역구 국회의원을 127석으로 줄이고, 47석인 비례대표 의석은 173석으로 늘린다.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비례성을 강화하면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이 쉬워질 전망이다. 이 외에도 이상민 의원은 풀뿌리 지역정당 및 온라인플랫폼 정당을 창당할 수 있도록 한 정당법 개정안,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현행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춘 국회법 개정안, 정당 국고보조금 배정에서 소수 정당 배분 비율을 확대한 정치자금법 개정안 등을 함께 발의했다. 이상민 의원은 “민주당은 호남을, 국민의힘은 영남을 지역적 근거로 패권을 갖고 독과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대양당이 상대방의 실책으로 반사적 이익을 얻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정치에도 경쟁의 원리가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은 대답 없는 메아리
관건은 이를 실천할 ‘원내 제1정당’ 더불어민주당의 의지다. 하승수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을 하겠다는 민주당의 전략이 안 보인다. 이미 지난 2월부터 선거제도 개혁을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어떤 전략으로 어떤 내용으로 할지, 또 국민의힘과는 어떻게 협상할지에 대한 전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관후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제출된 법안들의 실천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정개특위나 시민사회와도 교감 없이 발의했다. 동료 의원을 설득해야 하고 양당 지도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실천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두고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현행 선거제도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온 영남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당 지도부의 실천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권태흥 대구시당 정치개혁특별위원장(대구시당 지역위원장)은 토론회에서 “국회에서 최대 다수 의석을 갖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이 정치적 수사를 넘어 절박하게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실천하고 있는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하다”며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에 당의 명운을 걸어야 한다. 국민에게 수없이 정치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시대적 소명을 실현하지 못한 정당, 무책임하고 무능한 진보와 개혁 세력에게 국민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으려면 여론을 통한 동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승수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에 부정적인 국민의힘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국민 여론이 필요하다. 그런 틀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큰 전략이다. 정치개혁범국민협의회 같은 범국민적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관후 연구원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대선 이후 지지율 반등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정치인에 대해 가장 크게 실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것이다”라며 “누가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고 정치개혁 이슈를 선점할지가 지지율 상승에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그 부분을 가장 크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