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품격의 정치’…세상을 향해 ‘경고’하다

장영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2000년 10월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북한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미국이 북한의 민간위성을 타국에서 안전 조치하에 발사하는 데 동의해주는 대가로 북한이 모든 미사일의 생산, 시험, 배치 및 수출을 중단하기를” 요구했다. AP연합뉴스

2000년 10월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북한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미국이 북한의 민간위성을 타국에서 안전 조치하에 발사하는 데 동의해주는 대가로 북한이 모든 미사일의 생산, 시험, 배치 및 수출을 중단하기를” 요구했다. AP연합뉴스

“나는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이 대단히 기뻤지만 정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정치와 정치적 이슈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적인 혐오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정치 세계의 사람들은 타협을 해야 하고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기금을 모금하는 데 써야 하며 종종 과장된 공약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길을 걸어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만이 현실적이면서도 영원한 가치를 이룬다.”

1983년 1월,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어쩔 수 없이 이혼했다. 23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1년 전인 1982년 1월 남편 조는 갑자기 “우리의 결혼 생활은 끝났소. 나는 당신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하고 있소”라고 하며, “바로 짐을 싸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애틀랜타로 가서 살 것이라고 통보”했다. 45년 동안 살면서 그렇게 놀란 적은 없었다.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조지타운대학서 강의하던 시절
“여성들이 정상에 올라선 뒤에
다른 사람들 성공하도록 돕자”

[여성, 정치를 하다](4)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품격의 정치’…세상을 향해 ‘경고’하다
[여성, 정치를 하다](4)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품격의 정치’…세상을 향해 ‘경고’하다
[여성, 정치를 하다](4)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품격의 정치’…세상을 향해 ‘경고’하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조지타운대학 시절 기꺼이 “젊은 여성들을 위한” 역할 모델이 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이 정상에 올라선 뒤에 성공의 사다리를 치워 버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을 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갖고 역설했다”. 위 사진부터 10세 무렵의 올브라이트, 웰즐리대학 재학 시절, 미국 첫 여성 국무장관으로 기용된 올브라이트, 1999년 나토 사무관들과 함께 있는 올브라이트.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조지타운대학 시절 기꺼이 “젊은 여성들을 위한” 역할 모델이 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이 정상에 올라선 뒤에 성공의 사다리를 치워 버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을 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갖고 역설했다”. 위 사진부터 10세 무렵의 올브라이트, 웰즐리대학 재학 시절, 미국 첫 여성 국무장관으로 기용된 올브라이트, 1999년 나토 사무관들과 함께 있는 올브라이트.

웰즐리대학을 졸업하고 언론가문 출신의 전도유망한 저널리스트 조와 결혼한 매들린은 세 딸을 키우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올브라이트는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잡으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는 출산 직후부터 13년 동안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앤과 앨리스가 아직 아기 침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시작했던 논문이 그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야 끝이 났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1975년 5월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논문 발표를 마치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민주당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의 입법담당 수석고문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978년 지미 카터 행정부의 안보보좌담당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로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 진행 담당을 제안받았다.

국제정치를 전공하고 외교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매들린에게 상사이자 동료였던 에드먼드 머스키는 “여성이 의회의 국제관계 업무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장담”했지만, 남편 조는 달랐다. “어째서 이런 기회를 거절하지? 당신이 항상 원했던 기회요. 덤벼 봐요!” 그렇게 “진실로 친절하고 사려 깊고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 주었던 조”와의 결혼 생활이 종결되자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많이 고통스러웠다. “기혼 여성이 아닌 성인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이혼 후에도 막연히 조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올브라이트는 딸들과 “똘똘 뭉쳐서 특별한 유대감을” 만들며 자신에게 닥친 변화와 위기를 돌파했다.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클린턴 시절, 유엔 대사 지낸 뒤
국무장관 임명되자 ‘자질 논란’
“‘여성 최초’가 겪는 문제” 인식
꼼꼼히 준비…임명안 99 대 0 통과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1982년부터 조지타운대학에서 국제관계 강의를 맡고 있었다. 체코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올브라이트는 소련 및 동유럽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다. 실무 중심의 현장감 넘치는 그의 강의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기꺼이 “젊은 여성들을 위한” 역할 모델이 되었다. 조지타운대학의 우수한 여학생들에게 “당당하게 말해요!” “참견을 하세요!”라고 자주 말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이 정상에 올라선 뒤에 성공의 사다리를 치워 버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을 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갖고 역설했다”. 올브라이트는 4년 연속 조지타운대학 최고 교수로 뽑혔다.

강의실 밖으로도 움직였다. 그는 현장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정치를 제대로 연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올브라이트는 198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먼데일 선거 캠프에 합류한다. 그는 부통령 후보에 제럴딘 페라로를 적극 추천했다. “여성을 부통령 후보로 뽑는 역사를 세우는 것”이 학문적 성취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지타운대학과 민주당 대선 캠프를 병행하려면 분초를 아끼는 수밖에 없었지만, 20대 초반부터 시간과 싸워 왔기에 그는 분주한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올브라이트는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깨끗하게 졌다.

그러나 의미 있는 패배였다. “민주당의 표는 말살되었다. 가슴이 쓰렸지만 내게 있어 그때의 선거운동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민주당 최고 집단 안에 내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올브라이트는 성공과 실패는 눈앞에 주어진 상황으로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선거 패배 후 전략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전문가들과 포럼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조지타운대학 근처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개방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샐러드와 빵으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늦은 밤까지 현안별로 토론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1987년, 민주당 대선 후보들은 올브라이트를 외교 정책 고문으로 영입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돌연 나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사람들의 외교 정책 고문 중에서 최고가 되었다.” 그사이 이혼의 상처는 아물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수습하는 동안 공산주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었다. 탐구하고 배울 새로운 것이 많았다. 나는 때가 오면 다음 디딤돌로 펄쩍 뛸 준비를 하고 싶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빌 클린턴은 1993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올브라이트를 임명했다. 클린턴 행정부 1기 4년 동안 유엔 대사로서 전 세계에 존재감을 드러낸 올브라이트는 1996년 12월5일 아침 국무장관에 임명된다. 올브라이트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며 “남자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긴장만 하고 있지 않았다.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은 ‘올브라이트는 그 일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고, ‘난 그리 똑똑하지 않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라고 올브라이트가 사석에서 지인에게 한 말이 ‘뉴욕타임스’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기도 했다. 프라하 출신의 올브라이트가 유럽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그의 지적 능력에도 의구심이 든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사실 문제의 핵심은 간단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지 207년이 지난 지금 한 여자가 국무부의 최고 수장이 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올브라이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첫 번째’라는 꼬리표를 다는 모든 여자와 소수층이 맞닥뜨리는 문제”임을 인지했다. 주류들은 비주류를 향해 “자질을 갖춘 후보자가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지만, 올브라이트는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맞섰다. “사실 누군가 어떤 일을 맡아서 할 때까지 누구도 그의 자질을 판단할 수는 없다.” 올브라이트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NBC 인터뷰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내가 그 제안을 수락할 만한 자질이 있는지 걱정됐어요”라고 고백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친구들의 충고가 옳았다. “남자라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청문회 준비를 꼼꼼하게 마쳤다. 1997년 1월22일, 상원에서 올브라이트의 임명안은 99 대 0으로 통과되었다. 다음 날 올브라이트는 국무장관 취임 서약을 한다. 그는 국무장관으로서 자신의 점수는 “가장 가혹하지만 가장 공정한 심판관인 역사가 매겨 줄 것임을” 떠올리며 공무를 시작했다.

국제 문제 관련해선 ‘당파 초월’
필요하면 누구라도 찾아가 영입
2000년 김정일과 두 손 맞잡고
북·미관계 유연히 이끌어간 그
국제사회 긴장 국면마다 재조명

국무장관으로 반드시 달성하고 싶은 구체적인 목표도 있었다. “나는 국제 문제에 관한 한 당파를 넘어선 초당적 연합을 부활시키고 싶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대부분의 외교 문제에 있어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 더 이상의 선이 그어지지 않았기에 나는 이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입장이었다. (…) 공화당의 표가 필요할 때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올브라이트는 필요하면 누구라도 먼저 찾아가 대화를 청했다. “유능한 팀을 구성”하기 위해 “가능하기만 했다면 나는 단연코 초대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마저 내 팀에 합류시켰을 것”이라는 각오로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했다. 당파를 초월한 민주당 출신의 국무부 장관은 차츰 “자질”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부 세력들은 여전히 올브라이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흔들 수 있을 때까지 흔들어 보자는 심보였을까? 아니면 국무장관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없으면 깊은 상처라도 주고 말겠다는 의도였을까? 1997년 2월4일 ‘워싱턴포스트’ 1면 기사 제목은 ‘올브라이트가의 비극이 밝혀지다’였다. 부제는 더욱 폭력적이었다. “장관은 세 명의 조부모가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올브라이트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마치 무슨 범죄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그는 순간 “나의 조부모님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올브라이트에게 사퇴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국무부 장관 올브라이트의 능력은 국제사회가 긴장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더욱 돋보였다.

2000년 10월23일, 올브라이트는 북한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김정일에게 “미국이 북한의 민간위성을 타국에서 안전 조치하에 발사하는 데 동의해 주는 대가로 북한이 모든 미사일의 생산, 시험, 배치 및 수출을 중단하기를” 요구했고,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독단적인 핵 활동을 하지 않기를” 원하며 대화를 주도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유연하게 이끌어 갔던 올브라이트의 외교 전략은 북한 이슈가 부상될 때마다 재조명되고 있다.

냉철하고도 낙관적인 세계관을 유지했던 올브라이트가 80세부터 달라졌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올브라이트는 부쩍 의심이 많아졌다. 2020년, 83세의 올브라이트는 세상을 향해 “경고”한다. “기술 혁명의 어두운 밑바닥, 세상을 좀먹는 권력의 영향력, 진실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경시, 비인간적인 모욕에 대한 불감증, 이슬람 혐오증, 반유대주의로 추진력을 얻은 그 기류들은 이제 정상적인 공공 토론의 범위 안으로 밀려들고 있다.” 그는 저술과 강의에 매진하면서 “최악의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싶은 유혹”과 싸우고 있다. 역사는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여성 정치인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는 원로의 품격을 갖추었다.



[여성, 정치를 하다](4)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품격의 정치’…세상을 향해 ‘경고’하다

■장영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 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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