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 바첼레트
피노체트 정권의 고문 피해자 가족으로 자신도 비밀경찰에 피해
망명 귀국 후 복지부·국방부 장관 거쳐 칠레 첫 여성 대통령으로
국가폭력 진실 규명·배상 “분노·원한의 개입 없이” 일관된 추진
유엔여성기구 총재 → 재선 → 유엔인권 대표 ‘용기있는 여정’ 계속
“고문 후유증은 개인이 혼자서 감당하거나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정부는 진실과 정의를 회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추진 중입니다. 이 중대한 원칙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켜질 것입니다.”
2006년,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세계 최초의 남녀 동수 내각 장관을 출범시켰던 미첼 바첼레트는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와 관련해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사실 그녀 자신도 국가폭력 생존자였다. “저는 분노와 원한이 제 삶을 통째로 잡아먹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썼습니다.” 칠레의 굴곡진 현대사는 미첼 바첼레트 가족사와도 밀착되어 있다.
1973년 9월11일,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군 총사령관에 부임한 지 한달 만에 권력을 탈취한다. 쿠데타 세력들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게 투항을 명령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군부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는 라디오 연설로 국민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해 준 칠레 국민들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저는 결코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국민들께서 제게 주신 충정에 제 목숨을 바쳐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는 의연하게 최후를 맞았다.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반드시 극복해낼 것입니다. (…) 머지않아 드넓은 가로수길이 열릴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저는 굳건히 믿습니다.”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궁에 폭탄이 투하되었다.
아옌데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 동안 독재자로 칠레 국민들을 탄압했다. 반정부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양심적인 군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군 준장이었던 미첼의 아버지 알베르토 바첼레트는 아옌데 정부에서 물가관리위원 등 중책을 맡은 바 있었다. 알베르토 바첼레트 장군은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피노체트 정권의 회유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군사독재 정권은 공포정치 이외에는 권력을 운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은 알베르토 바첼레트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 알베르토 바첼레트는 공군사관학교에 감금된다. 모욕적인 수사와 처참한 고문이 이어졌다. 1974년 3월 알베르토 바첼레트는 목숨을 잃게 된다. 비극은 고문치사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피노체트 정권은 유족들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그들을 궁지로 몰아갔다. 고인의 은행 계좌를 동결시켰다. 남은 가족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미첼 바첼레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정의감이 투철한 딸이 칠레의 의료 기술과 보건 정책 발전에 기여하는 인재로 성장하길 원했다. 딸에게 의과대학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1970년 칠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미첼 바첼레트는 의학과 사회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아버지를 국가폭력으로 잃고 난 뒤부터 미첼은 사회 모순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상범으로 수배 중이던 운동가들을 조직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1975년 1월, 미첼 바첼레트의 집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피노체트 정권 유지에 앞장섰던 비밀경찰은 칠레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로 미첼 바첼레트 모녀를 끌고 갔다. 한 사람씩 고문을 당했다. 미첼 바첼레트는 어머니와 함께 망명길에 오르기로 한다. 1975년 2월 칠레를 떠났다. 호주를 거쳐 독일에 정착했다. 미첼은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했지만, 칠레의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미첼 바첼레트는 1979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칠레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1980년 피노체트는 헌법까지 고쳐가며 군부의 장기 집권을 획책했다.
미첼 바첼레트는 군부 독재 정권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라도 전문성부터 쌓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1970년에 입학했던 칠레 의과대학을 12년 만에 졸업한다. 1982년에 외과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환자들에게 문턱이 낮은 병원을 운영하고 싶었다. 피노체트 정권은 연좌제와 반(反)정부 시위 경력을 문제 삼아 그녀의 개업을 막았다. 미첼 바첼레트는 1983년부터 스웨덴 정부가 운영하는 로베르토 어린이병원에서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는 한편 수도 산티아고 및 칠레 전역에서 고문을 받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자녀들을 돕는 비정부기구인 ‘국가 비상사태에 의한 피해아동 보호센터’에서도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이 기구에서 미첼 바첼레트는 1990년까지 의료 담당 책임자로 근무했다.
칠레의 민주화 열기는 점차 높아졌지만, 피노체트 정권은 공고했다. 폭정을 끝내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범(汎) 진보진영은 단일화를 결정한다. 기민당, 사회당, 민주사회당, 사회민주급진당 등 진보정당들은 1988년에 피노체트의 집권연장을 막기 위해 뭉쳤다. 서광이 비쳤다. 1989년 12월 총선에서 진보연합은 승리했다. 칠레는 1990년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교체를 이뤘다. 아옌데의 예언은 적중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칠레인들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90년에 새롭게 출범한 칠레 정부는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미첼 바첼레트는 보건복지부에 발탁되었다. 국가에이즈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세계보건기구 자문역도 맡았다.
의사이자 시민운동가, 보건행정 전문가로 보폭을 넓힌 미첼 바첼레트는 1996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45세의 나이로 칠레 국립정치전략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군사학 공부를 시작했다. 최우수 성적으로 국립정치전략 아카데미를 졸업한 미첼은 1997년에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워싱턴DC의 안보대학(Inter American Defense College)에서 유학했다.
미첼의 전문성과 실무 능력은 칠레 사회에서 점차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리카르도 라고스는 미첼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공공 보건의료 제도의 재정비가 시급했다. 미첼 바첼레트는 의료 시설의 개방성과 접근성 제고(提高)에 사활을 걸었다. 그녀는 칠레의 공공 보건의료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주말은 물론이고 24시간 운영되는 의료 서비스를 구축해서, 칠레 국민들이 언제라도 병원을 찾아갈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국민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은 또 한 번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2002년, 미첼 바첼레트는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다.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은 그녀가 칠레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갈 정치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임명권자의 결정은 존중받지 못했다. 51세의 여성, 게다가 군 외부 출신인 미첼 바첼레트를 ‘최고 사령관’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는 세력이 많았다. 고문치사 사건의 피해자 유족인 미첼 바첼레트가 사건 관련자들을 찾아내 그들에게 보복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며 그녀의 장관 임명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은 장관 임명을 강행한다. 미첼 바첼레트는 국방부 장관 취임 전 자신에게 제기되었던 모든 논란을 이내 잠재웠다.
국내 안보전략, 무기 구입 및 군대 연금제도와 신규 군대 설비 구축 등 중요한 사안들을 신중하게 처리해갔다. 공적인 업무에 사적인 원한을 조금도 섞지 않았다. 그녀가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국방부 장관의 임무는 군사력 강화였다. 칠레 군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미첼 바첼레트는 군과 민간 사이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국가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대선 주자로 껑충 뛰어올랐다. 미첼 바첼레트가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2004년 9월, 그녀는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한다.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미첼 바첼레트는 “교육의 평등, 삶의 질 향상, 의료 복지”를 주요 공약으로 채택했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칠레 국민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미첼 바첼레트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그녀의 사생활을 캐내 공격하는 무리들이 등장한다. 미첼 바첼레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저는 이혼녀입니다. 종교에 회의적입니다. 불가지론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이 모든 조건들이 칠레의 대통령 후보자인 저에게 불리하다 못해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숨기고 싶지도 않습니다.” 미첼 바첼레트는 여성 정치인으로서 하고 싶은 말도 당당하게 밝혔다. “칠레는 여성을 오랜 시간 내팽개쳐 왔습니다.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칠레 여성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칠레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2006년 1월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 미첼 바첼레트는 2006년 3월11일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녀는 남녀 동수로 구성된 내각 장관들과 함께 칠레의 번영을 모색했다. 그리고 군부 독재 정권 시절 자행되었던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정부 차원의 ‘배상’과 ‘진실 규명’을 일관된 의지로 추진했다. “칠레가 당신과 함께한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동안 자신이 외쳤던 구호를 잊지 않았다. 그녀의 진심이 국가폭력 희생자들에게 전해졌다. 경제 성장에도 박차를 가했다. 실용주의 정책을 적극 채택했다. 2010년 1월, 칠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다. 두 달 뒤, 그녀는 임기를 마치고 명예롭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국제기구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첼 바첼레트는 퇴임 직후인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양성평등과 여성 권익 증진을 위한 유엔 여성기구 총재로 공직 활동을 이어나갔다.
한편 칠레 국민들은 미첼 바첼레트가 정계로 복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첼 바첼레트, 2014년에 다시 만나요!” 그녀는 재선(再選)에 성공했다. 미첼 바첼레트는 2014년 3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유엔도 그녀를 다시 찾았다. 2018년 대통령직 퇴임 후부터 2021년 현재까지 미첼 바첼레트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재직 중이다. 미첼 바첼레트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사형제도 폐지와 대북 경제제재 완화, 북한 인권 개선, 차별 혐오 금지 등의 정치적 메시지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험난한 여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 정치인의 용기를 예찬한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