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과격하다는 ‘딱지’에도…일본의 여성차별 철폐 이뤄낸 ‘열혈 기자’

장영은

마쓰이 야요리

마쓰이 야요리는 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해온 언론인이었다. 또한 자신에게 갑자기 닥쳐온 죽음보다 일본군 ‘위안부’ 재판 결과를 걱정하던 인권운동가였다. 사진은 2003년 잡지 ‘아고라’ 특집호 표지.

마쓰이 야요리는 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해온 언론인이었다. 또한 자신에게 갑자기 닥쳐온 죽음보다 일본군 ‘위안부’ 재판 결과를 걱정하던 인권운동가였다. 사진은 2003년 잡지 ‘아고라’ 특집호 표지.

“특히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제창하여 실현시키고, 훌륭한 헤이그 판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위안이 됩니다. 이 성과를 어떻게든 널리 퍼뜨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같은 역사적인 ‘법정’을 일본의 미디어는 무시했고, 특히 말도 안 되게 편집하여 왜곡 방송한 NHK에는 책임을 묻기 위하여 작년에 제소했습니다. 그 원고로서의 책임을 끝까지 다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든 공정한 판결이 내려질 수 있도록 NHK 재판의 지원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쓰이 야요리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병으로 쓰러져 버렸다”. 중증 폐결핵과 결핵성 복막염으로 요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과 <레미제라블>을 좋아했고, 고등학교에서는 세계사에 푹 빠져 “넓은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에 불타올라 열심히 공부”했던 마쓰이 야요리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아팠다. 결핵 특효약인 스트렙토마이신을 100회 이상 맞으며 조금씩 회복해갔지만, 복학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쓰러졌다. 신우염이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16세부터 20세까지 만 4년 동안 꼬박 투병 생활을 했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병상의 고독과 초조함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혼자만 “점점 뒤처진 채 남겨지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러나 마쓰이 야요리는 죽음 대신 삶을 생각했다.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면서 살기로 다짐한다. 1955년, 마쓰이 야요리는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미과(英美科)에 입학했다. 투병 기간을 떠올리면, 단 1초도 결코 허비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쓰리 스피드(three speed)’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로 빨리 말하고, 빨리 걷고, 빨리 먹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1957년 여름에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미네소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년 후에는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1959년 가을,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1961년 아사히(朝日) 신문사에 입사한다. “그때는 여기자가 특수한 존재였으며 사회부에서도 한 명뿐인 여자였다. 입사식에서도 모두 남성인데 여성은 나 혼자만 우두커니 있었다.” 실력 이외에 기자로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여성, 정치를 하다](26)과격하다는 ‘딱지’에도…일본의 여성차별 철폐 이뤄낸 ‘열혈 기자’

죽다 살아나 미국·프랑스 유학
당시 특수한 존재인 여기자로서
일본 경제 성장의 그림자 들추고

엘리트 남성 주도하는 사회서
여성차별철폐조약 특종기사로
국적법 개정 등에 영향 미쳐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 경제 성장의 이면을 파헤치는 보도로 주목받았다. “공해와 약물 피해 그리고 농약 오염”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다. 특히 1960년대 일본에서는 탈리도마이드 약물로 “팔다리가 없거나 청력 장애를 가진 장애아”로 태어난 사람들이 심각한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었다. 크게 분노했다. “탈리도마이드 재앙이라는 심각한 약물 피해는 무엇보다도 후생성에 책임을 물어야 했다. 탈리도마이드의 안전성 문제는 해외에서 몇 번이나 정보가 들어왔는데도 그것을 후생성이 숨긴 것이다.” 수은 중독 또한 일본 사회를 파괴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마쓰이 야요리는 미나마타병 취재 과정에서 “사람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대기업 간부들, 후생성 관리와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1970년대 일본에서는 “엘리트 남성 주도의 환경 파괴적인 경제와 사회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운동가들이 있었다. 마쓰이 야요리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특히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 이야기를 ‘따뜻한 필체’로 전한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쓰이 야요리는 기자가 되어 “일본 사회 전체가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움직이는지” 알게 된 이상,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런 관점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남성 기자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경계했다. “저 여자는 너무 과격하고 너무 극단적이야”라는 ‘딱지’를 함부로 붙였다.

마쓰이 야요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1980년에 마쓰이 야요리는 ‘여성차별철폐조약’ 특종기사를 썼다. 아버지가 일본인일 경우에만 일본 국적을 아이에게 줄 수 있었던 국적법의 개정과 남녀고용기회균등법 제정 등을 촉구하는 기사 “부인차별철폐조약 서명 보류-법 개정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가 1980년 6월7일 아사히신문 1면에 실렸다. 이 기사는 일본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 달이 지나도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뒤늦게 각료 회의를 거쳐 차별철폐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 국내의 여성 문제뿐 아니라 아시아 여성들의 현실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과의 인연 또한 특별했다.

마쓰이 야요리를 기리는 전시회 카탈로그 사진.

마쓰이 야요리를 기리는 전시회 카탈로그 사진.

기생 관광·‘위안부’ 피해자 등
아시아 여성 인권에 주목하며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로 분투

정년 마친 여성 기자 1호이자
여성 운동가의 마지막 당부는
“사랑하라! 분노하라! 싸워라!”

그는 1973년 서울 김포공항에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매춘관광 반대!’를 외치며 데모를 했다는 기사를 보고 “이상하게 끌렸다.” 취재 결과, “일본인 남성들이 한국의 여성들을 노리고 단체 관광을 대거 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기생관광을 주력 상품으로 하여 여행사가 팔기 시작한 이 패키지 투어로 연간 50만명이나 되는 남성들이 한국으로 몰려간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마쓰이 야요리는 이 사실을 널리 보도하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지면에 좀처럼 실리지 않았다.” 기사를 보내고 일주일 정도 지나 석간에 “겨우 앞부분만 작은 기사”로 나갈 따름이었다.

마쓰이 야요리는 보수적인 언론계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1973년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기생관광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모임’을 만들어 “하네다 공항에서 서울로 출발하는 남성들에게 항의 의사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들은 전단에 “부끄러운 줄 알아라! 매춘이 목적인 관광단!”이라고 매춘관광 반대를 호소했다. 1980년에는 필리핀 마닐라로 취재를 떠나 일본인의 매춘관광을 비판하는 기사를 2회에 걸쳐 발표했다. 그는 취재 현장을 아시아 전역으로 넓혀가기로 결심한다.

1981년에 마쓰이 야요리는 뉴욕 특파원 자리를 제안받았다. “미국이나 유럽, 워싱턴, 뉴욕, 런던 같은 곳의 특파원이 인기가 있었으며, 그 후 사내에서의 승진도 보장이 되었다.” 하지만 마쓰이 야요리는 상사에게 아시아 특파원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신문사 내부에서는 그를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단아” “마녀 기자” 등으로 통했던 마쓰이 야요리는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4년 동안 근무하면서 아시아 “18개국의 땅을 밟았고, 이웃인 아시아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취재했다. 아시아 곳곳에서 2차 세계대전의 깊은 상흔을 체감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옛날의 일본군 만행에 대하여 싱가포르 특파원 시절에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취재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 위안부였던 노수복이라는 분의 이야기로, 말레이시아 국경과 가까운 태국 남부 파쟈이라는 마을에 살고 계셨기 때문에 방문한 적이 있다.” 위안부 피해자 노수복은 “40여년 동안 모국어를 말하지 않았기에, 한국어가 아닌 태국어로” 이야기했지만, 그의 방 안에는 “작은 태극기와 색이 바랜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일본인 경찰관에게 끌려가 “군복을 받고 배에 태워져 40일 후에 도착한 곳이 싱가포르”였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대와 함께 태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이 항복해서 영국군이 관리하는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태국에 남은 노수복의 생애를 담은 인터뷰 기사를 1984년 11월2일 아사히신문 석간에 발표했다. “얼마만큼 그녀가 잔혹한 경험을 당했는지를” 안다면 위안부 문제가 얼마나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아사히신문 조사부 위안부 파일에 인터뷰 기사를 보관했다.

1985년 4월,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 아사히신문 본사로 복귀한다. 그는 일본에서 거주 중인 아시아 여성들의 생활을 밀착 취재하는 한편 일본의 개발원조 프로그램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기사를 써 내려갔다.

1990년대가 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정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필사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매달렸다. 1993년 봄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제소하자, 현지로 취재를 떠나 그들에게서 당시의 참상을 듣고 일본으로 돌아와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신문사에서는 “정말 싫다” “지겹다 지겨워”라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쓰이 야요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해자인 군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3년 3월29일부터 31일까지 3회에 걸쳐 일본군 가해자 취재 기사를 “간신히 실었다.”

1994년 4월, 마쓰이 야요리는 아사히신문 기자 생활을 명예롭게 마쳤다. “33년 전, 도쿄 본사에 단 한 명의 여성 기자로 입사하여 모든 과정을 거치며 정년까지 일한 여성 기자 제1호가 되었다.” 그는 퇴직 후 본격적으로 여성 운동가로 움직였다. “정년 후, 처음 관련한 활동은 ‘동아시아 여성 포럼’ 개최 코디네이터였다.” 그리고 1995년 4월 ‘아시아 여성자료 센터’를 설립했다. 2000년 12월에는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도쿄에서 열고, 1년 후인 2001년 12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최종 판결을 얻었다.”

2001년 한 시민단체 강연회에서 발언 중인 마쓰이 야요리.

2001년 한 시민단체 강연회에서 발언 중인 마쓰이 야요리.

일본 우익들은 “반일 집회를 그만둬라!” “이것은 짜고 치는 재판이며, 날조이다”라고 했지만,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 국가의 책임을 추급하는 것과 전시 성폭력 불처벌의 순환을 끊는다는 두 가지 목적”을 법정에서 이루고자 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2002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카불 방문 중에 몸에 이상을 느낀 마쓰이 야요리는 급히 귀국했다. “암을 선고받고 영면할 때까지 시간이 82일밖에” 없었지만, 그는 글쓰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자서전을 시작하며 젊은 독자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했다. “지금 시대에 특히 일본에서는 싸우는 것이 이단시된다. 따라서 싸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에게 그런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위안부와 인신매매 피해자, 그리고 아시아에서 가장 학대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싸워 온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내서 싸워라!’ 이것이 내 마지막 힘을 다한 마음의 외침이다.” 마쓰이 야요리는 자서전 집필 도중인 2002년 12월29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짓밟히고 무시당한 지극히 작은 자들 편에 서서 권력에 저항하는 자세로 일관”하며, “어떠한 공적인 사회적 지위와도 무관했던”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마쓰이 야요리는 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언론인이었다.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닥쳐온 죽음보다 위안부 재판 결과를 더욱 걱정하던 인권 운동가였다. 그를 아시아의 정의로운 여성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마쓰이 야요리의 자서전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 마쓰이 야요리의 생명의 기록>(김선미 옮김,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4)을 읽고 큰 감동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26)과격하다는 ‘딱지’에도…일본의 여성차별 철폐 이뤄낸 ‘열혈 기자’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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