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대선버스가 출발했다. 일찌감치 대선준비단을 꾸렸고, 대선 주요 의제로 기후위기, 불평등 해소, 차별금지를 제시했다. 정부가 국민의 일자리를 책임지는 국가일자리보장제 등 핵심 정책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다. 원내정당 가운데 가장 빠른 대선 행보다.
정의당의 신속한 대선 모드 전환은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 여파로 기대 이하 의석수(6석)를 얻었고, 이후 지난 1월에는 김종철 전 대표가 성추행 사건으로 사임하는 악재가 터졌다. 정의당은 4·7 재보궐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는 것으로 공당으로서 책임을 졌다. 선거를 치르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다. 지지율은 하락세를 거듭했고 당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정의당 지지율은 5% 박스권에 갇혀 있다. 장혜영 의원과 류호정 의원 등 청년 정치인들이 연일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지지율은 제자리다.
정의당 입장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연이은 악재 속에 사라진 존재감을 살려내야 한다. 대통령 선출에 실패하더라도 의미 있는 선거를 치러야 당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않다. 당장 대선버스에 올라탈 대선주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내 후보군으로는 심상정 의원과 이정미 전 대표가 거론되지만 침체된 당 분위기를 반전시킬 카드로는 역부족이라는 평이 나온다. 대선 국면에서 인물의 부재는 흥행 부진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정의당은 대선 준비 과정에서 ‘승자독식 양당체제’를 깨뜨릴 ‘제3정치세력’을 한데 모으겠다는 심산이다. 이른바 진보의 재배열을 지휘하고 그 구심점에 서겠다는 것이다. 정의당 대선버스는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대선버스는 출발했지만
“모든 선거에서 늘 그랬듯이, 정의당이 대선 준비체제를 원내정당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가장 관심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피선거권도 없는데, 제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준비단 단계에서부터 정의당의 대선이 잘 알려지도록, 아주 시끄러울 수 있도록 다양한 각도로 성실히 궁리해보겠습니다.”(류호정 정의당 의원, 6월 14일 정의당 대선준비단 제1차 공개회의)
류 의원의 말처럼 정의당의 대선은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가장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대선주자의 부재가 선거 흥행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여영국 정의당 대표는 6월 14일 대선준비단 회의에서 “언론에서 대선후보가 누구냐고 묻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아직 정의당 대선후보가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며 “정의당은 대선후보 한명의 정치적 통찰로 대선을 치를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여 대표의 말처럼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은 유력 대선주자에 집중하지 않는다. 정의당이 ‘인물 대선’ 대신 택한 대선 전략은 ‘가치연대’다. 반기득권을 기치로 내걸고 뜻이 같은 세력을 모두 아우르겠다는 전략이다. 반기득권 세력은 기후위기와 차별, 불평등 해소라는 가치에 동의하는 모든 정당과 정치세력, 시민사회, 풀뿌리조직 그리고 개인을 뜻한다. 부산 가덕도 신공항 반대하는 주민과 차별금지법 제정에 동의하는 시민도 연대의 대상이다.
대선후보는 반기득권 연대 안에서 선출한다. 정의당 당원투표로만 선출하는 ‘정의당 후보’가 아니라 개방형 경선을 통해 반기득권 연대 후보를 뽑는다. 박원석 정의당 대선준비단장은 “정의당 안에도 검증된 후보가 있지만 더 많은 후보가 나와 역동적인 선거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당을 넘어서는 반기득권 진영 전체 경선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가치연대 기반 개방형 경선은 차세대 대선주자 발굴에 실패한 정의당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21일 발표한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 결과(TBS 의뢰 공동조사·조사기간 지난 18~19일·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지지율은 1.4%를 기록했다.
마땅한 대선주자가 없는 정의당은, 그래서 반기득권 정치동맹 ‘플랫폼’을 강조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거대 양당에 맞설 세력의 중심에 정의당이 서겠다는 구상이다. 정의당은 재보궐선거 이후부터 반기득권 가치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지난 6월 14일에는 여영국 대표가 “반기득권 세력은 정의당 플랫폼으로 모이자”며 공개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정의당의 반기득권 연대 구상은 ‘탈민주당’을 통해 나왔다. 지난 총선 비례위성정당 설립 건으로 민주당과 틀어진데다 각종 현안을 두고 번번이 대립하면서 두 당의 느슨한 공조 관계도 깨졌다. 지난 4·7 재보궐선거에서도 정의당은 민주당의 지원 요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대선에서도 ‘민주당과 단일화는 없다’고 못박았다. 단일화가 아니라면 두 당의 협치를 기대하기는 요원하다. 정의당 도움 없이 입법 독주가 가능한 만큼 민주당이 애써 손잡을 이유가 없다.
정의당은 ‘민주당 2중대’ 꼬리표를 떼어내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완화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2차 전국민재난지원금, 종부세 2% 부과안 등 여러 사안에서 정의당은 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웠다. 민주당을 국민의힘과 기득권 세력으로 한데 묶고 대안 정당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전략이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정당이라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밝혀야 하는데 지금 민주당은 당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모호하다”며 “분명한 것은 국민의힘의 반대편에는 민주당이 아니라 정의당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과 거리를 둔 이후 정의당은 진보의 색깔을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대선 국면에서 정의당이 원하는 역할은 하나의 진보정당에 그치지 않는다. 제3정치세력의 중심, 반기득권 세력의 구심점이 되길 원한다.
■호응 없는 정의당 제안
정의당의 구상이 실현되려면 무엇보다 다른 정당의 호응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의당의 연대 제안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다른 당에서도 구체적인 동맹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정의당 관계자는 “지금까지 외부에 알릴 만한 변화는 없다”며 “다양한 현안을 매개로 여러 주체와 물밑 만남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홍명교 정의당 전 혁신위원은 ‘일단 우리에게 들어오라’는 정의당의 전략은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홍 전 위원은 “막막하다 보니 논의 과정 없이 그냥 던져본 것”이라며 “‘우리가 플랫폼이 되겠다’고 말한 뒤 녹색당이든 미래당이든 반응이 오면 구체화하려는 전략 같은데 어느 당도 준비 안 된 상태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창인 정의당 남양주시위원회 부위원장도 “정의당이 플랫폼이 될 테니 들어올 사람은 들어오라는 것은 좋은 방식이 아니다”라며“ 어떤 세력, 어떤 정당, 어떤 집단과 같이할 것인지 당에서 먼저 선명하게 밝히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당의 플랫폼화로 인해 자칫 당 고유의 색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기득권’을 하나의 세력으로 묶을 경우 당이 대변하고자 하는 세력이 누구인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최재식 정의당 서울시당 동대문구 지역위원장은 “정의당은 강령이 있고 정책이 있는 당”이라며 “섣부른 플랫폼화 논의는 당이 그동안 추구해온 핵심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 플랫폼화 같은 중대한 아이디어는 전국위원회와 같은 공식기구의 논의를 먼저 거치고 나서 외부에 밝히는 게 맞다”고 말했다.
가치를 중심으로 한 연대를 구성한 뒤에도 과제는 남는다. 각 세력의 요구를 조율해 대선용 공약과 정책으로 만드는 까다로운 작업을 해야 한다. 반기득권 이름으로 한데 묶였더라도 어디까지나 느슨한 연대일 뿐 이들 집단이 모든 가치를 동일하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세제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반기득권 연대에서 이견이 없는 의제는 기후위기와 불평등 해소, 차별금지와 같은 진보의제인데 중요하긴 하지만 이것으로는 유권자의 표심을 움직일 수 없다”며 “진보적 의제이면서도 새로운 정책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차라리 모병제 도입처럼 정의당 공약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