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엘리트와 아웃사이더 대결’ 2002 대선이 아른거린다읽음

박성민

‘이재명 대세론’과 대항마

16대 대통령 선거 사흘 전인 2002년 12월16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오른쪽)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SBS에서 열린 합동 TV토론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6대 대통령 선거 사흘 전인 2002년 12월16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오른쪽)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SBS에서 열린 합동 TV토론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권자 투표 행태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다. 사회학적으로 접근한 컬럼비아 학파는 유권자는 그가 어떤 사회집단이나 사회네트워크에 속했는가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지역·계층·인종·종교 등이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본 것이다. 반면 사회심리학적으로 접근한 미시간 학파는 정당에 대한 귀속감, 쟁점에 대한 태도, 후보자에 대한 선호에 따라 투표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복잡한 정보의 지름길로서 ‘정당 일체감’을 강조했다. 쉽게 말해 판단이 어려우니 “정당 보고 찍는다”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이론’도 있다. 유권자는 과거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미래를 선택한다는 주장이다. 선거의 성격에 따라 ‘전망적 투표’와 ‘회고적 투표’로 구분한다. 정권 중간에 치러지는 총선은 ‘심판’이라는 회고적 성격이 강한 반면, 새로운 5년을 맡길 대통령 선거는 ‘기대’를 반영한다는 논리다. 미국 대통령의 재선 도전 선거는 회고적 성격이 강하고, 5년 단임 우리 대통령 선거는 전망적 성격이 좀 더 강하다.

오랜 시간 선거를 관찰한 결과 우리 대통령 선거는 ‘정당 일체감’보다는 ‘인물 일체감’이 더 큰 듯하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아 ‘인물을 좇아’ 이합집산하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7명의 대통령 모두 다른 당명으로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민주정의당,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이명박은 한나라당, 박근혜는 새누리당, 문재인은 더불어민주당이다.

2016년 총선 당시 정당 지지율이 선거 예측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① 김대중 대통령 ② 노무현 대통령 ③ 이명박 대통령 ④ 박근혜 대통령 중 누구를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내심’이 드러났다. 새누리당 지지가 더 높은 지역에서도 ①과 ② 합이 ③과 ④ 합보다 높은 지역은 민주당 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한국의 역대 대선을 지켜보면
정당보다는 인물 보고 찍어
노태우 이후 7명 대통령 모두
다른 당명으로 당선이 방증

나는 이 결과에서 한국 유권자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인물에 투사한다는 영감을 받았다. 조국 사태 때 “① 조국 법무부 장관을 신뢰합니까? ② 윤석열 검찰총장을 신뢰합니까?”로 묻거나 “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신뢰합니까? ② 진중권 동양대 교수를 신뢰합니까?”로 물었다면 민심을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보수 측 인사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홍준표가 국민의힘 후보가 될 수도 있나요?”와 “이재명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나요?”다. 질문을 해석하면 “윤석열이 좀 불안해 보이네요” “민주당은 이재명이 되겠죠?”라는 전망과 함께 “어떻게 이재명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나요?”라는 불만과 불안이 읽힌다.

좋은 학교를 나온 ‘주류 엘리트’일수록 홍준표나 이재명 같은 ‘아웃사이더’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건 미국 주류 엘리트가 버락 오바마나 도널드 트럼프를 배척한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비주류 아웃사이더인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 이미 대통령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이재명은 왜 안 되겠는가.

아웃사이더는 기득권 엘리트에 대해 ‘분노’하는데 주류 엘리트는 “밑에서 올라온” 아웃사이더를 ‘경멸’한다. ‘주류 중의 주류’ 이회창과 ‘비주류 중의 비주류’ 노무현이 맞붙은 2002년 대선이 그런 양상으로 흘러갔다. 두려움에 과도하게 사로잡히면 상대를 경멸하게 된다. 경멸은 두려움의 방증이다. “두려움이 잉태하여 경멸을 낳고, 경멸이 장성하여 패배를 낳는다.”

“왜 최고의 학벌을 가진 주류 엘리트들이 아웃사이더에게 패배하는가?”는 나의 오랜 주제였다. 최고 엘리트들이 정치에서 실패하는 이유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① 정치를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한다. ② 정치를 (동지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한다. ③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가 없다. 내 결론은 그들의 그런 특성이 정치에서 실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치는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사람이 성공한다.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사람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정말 유권자의 투표 행태는 합리적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람에 따라 ‘합리’에 대한 해석이 다를 뿐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자산이 크게 늘어난 강남에 반문재인 유권자가 많고, 자산이 줄고 전·월세 대란의 피해를 본 서민이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다면 뭔가 불합리해 보인다.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다. 지지한 정부의 ‘정책의 배신’으로 물질적 손실이 따르더라도 자신이 싫어하는 기득권 엘리트에게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다면 그 선택을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을 인정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고통당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는가.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미국도 극심한 정신적 분열을 겪었다.

어려운 이론이 아니더라도 유권자가 정당이나 후보를 선택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① 좋아해서, ② 필요해서, ③ 상대가 싫어서 찍는 것이다. 팬덤이 많거나, 국정 능력이 뛰어나거나, 비호감이 적어야 이길 수 있다. 정권 교체 여론이 정권 유지 여론보다 다소 높기는 하지만 국민의힘이 정권 교체를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①, ②, ③ 중에 어느 것 하나 민주당을 압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잃은 게 치명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동의 이름은 ‘여민관(與民館)’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 ‘위민관(爲民館)’으로 바뀌어서 박근혜 정부 때까지 유지되다가 문재인 정부가 다시 ‘여민관’으로 돌려놓았다. 두 이름은 두 정치 세력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여민과 위민은 ‘대중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상징한다. ‘더불어’는 민주당의 정치 철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엘리트주의는 대중을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보는 한계가 있지만 능력·품격·헌신(노블레스 오블리주)이 강점이다. 보수는 최근 이 세 가지를 모두 상실했다.

히말라야가 무너지면 에베레스트의 아우라도 사라진다. 보수의 페르소나 박근혜가 몰락하자 보수의 아우라도 사라졌다. 민낯이 드러나자 보수는 저잣거리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김어준의 나꼼수와 뉴스공장은 타락한 양반(주류 엘리트)들의 위선을 조롱하는 한판의 마당놀이다. 미(美)나 숭고함보다는 추(醜)와 비속이 두드러지고, 서민적 비애, 풍자와 해학으로 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반란의 시대, 놀이의 시대다. 대중은 환호하고 엘리트는 환장한다.

민주당 첫 지역 경선서 압승
이재명, 승기 굳히기 확실시
국민의힘 경선 판도를 바꾸는
게임체인저로 작용할 듯

‘누가 문재인 정권에 맞섰나’서
‘누가 이재명에 경쟁력 있나’로
야당 후보에 대한 질문 달라져

전통적으로 민주당 경선은 기득권 엘리트를 향한 대중의 잠재적 전복 기운이 폭발하는 정치적 반란의 장이다. 이 에너지를 과소평가하는 보수 엘리트들은 ‘이재명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순회 경선 첫 지역인 대전·충남에서 54.81%로 압승했다. 27.41%를 얻은 이낙연 전 대표를 더블 스코어로 눌렀다. 본인도 “제 생각보다 좀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놀랄 정도로 큰 격차였다. 무엇보다 과반의 지지를 받은 것이 의미 있다. 당심도 결국 민심을 따랐다. 대세론이 탄력을 받았다. 민주당 경선은 사실상 승부가 끝났다. “될 사람 밀어주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 9월12일 1차 ‘슈퍼위크’에서 민주당 후보가 조기에 확정될 수도 있다.

모든 정권이 ‘믿을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후보를 찾았지만 늘 실패했다. 언제나 “이길 수 있으면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있으면 이길 수 없었다”. 친문도 “이재명은 믿을 수 없고, 이낙연은 이길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하지만 결론은 뻔했다. 어느 정당이 이길 수 없는 후보를 뽑겠는가.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 있는 후보를 믿을 도리밖에 없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 조기 확정은 국민의힘 경선 판도를 바꾸는 게임체인저다. 지금까지는 “누가 가장 문재인 정권에 맞섰는가?”였지만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가시권에 들어오는 순간 “누가 이재명에 맞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가?”로 질문이 바뀐다. 기준이 바뀌면 선택도 달라진다. 첫 번째 질문의 정답은 누가 봐도 윤석열이지만 두 번째 질문의 정답은 이제부터 찾기 시작할 것이다.

윤석열의 첫 번째 위기다. 이 위기를 잘 넘긴다고 하더라도 “누구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정권 교체인가?”로 질문이 또 바뀌는 순간 두 번째 위기가 올 수 있다. 국민의힘 입당을 선택한 순간 대비했어야 할 위기다. 최재형의 처지는 더 군색하다. 애초부터 (윤석열) ‘대체 카드’로 출발한 한계가 뚜렷하다. ‘반문 주자’로서는 윤석열에 밀리고, ‘보수 정통성’으로는 홍준표를 이길 수 없고, ‘개혁 보수’로는 유승민·원희룡을 넘을 수 없다. 4명이 참여하는 파이널 경선에서 보지 못할 수 있다.

‘역선택 방지’ 주장은 윤석열·최재형의 정치적 역량 미숙을 보여준다. 자칫 명분도 실리도 다 잃을 수 있다. 사실 역선택 방지는 누구나 선거인단이 될 수 있는 민주당에서 나올 얘기지 랜덤으로 여론조사하는 국민의힘에서 나올 얘기가 아니다. 확률적으로 희박한데 현실적으로 벌어질 일인 양 호도하는 것은 패배에 대한 불안과 초조만 노출시킬 뿐이다.

결국 최재형이 발을 뺐다. “저희 캠프 역시 역선택 방지를 주장한 바 있으나 정해진 룰을 바꾸는 것이 저의 가치관과 맞지 않아 멈추기로 했다”고 했지만 경선룰이 아니라 현직 감사원장이 곧바로 대선에 출마하는 선례를 남기는 일이 가치관에 맞는지부터 신중했어야 한다. 윤석열만 우스운 꼴이 됐다. 관철시킬 수 있는 정치적 힘도 없이 ‘대선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을 주장한 것은 전략적 실수다.

뜨는 홍준표, 봉하마을 찾아
‘2002년 노무현처럼’ 문구 남겨
윤석열은 위기 넘길 수 있을까

“추석 전후로 골든크로스로 갈 수 있다”며 부쩍 자신감을 보인 홍준표는 광폭행보를 하고 있다. 3일 경남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후 방명록에 “2002년 노무현 후보처럼”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 제일 소탈했던 분이었다. 당이 달라 그분을 힘들게 한 적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회상했다. “진보에는 노무현이 있었다면 보수에는 홍준표가 있다”며 ‘보수의 노무현’으로 불리길 기대했다.

윤석열로서는 홍준표만 버거운 상대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맞서 ‘따듯한 보수’를 내세운 ‘개혁 보수’의 상징 유승민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무엇보다 그는 경제 전문가다. 경쟁자인 윤석열·홍준표·원희룡·최재형이 모두 법조인이라면 확실히 차별화된 경쟁력이다. 토론에 강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다. 파이널 경선에서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원조’ 개혁 보수 원희룡도 무시할 수 없다. 3선 국회의원과 재선 도지사 경력의 원희룡은 민주당 후보가 유력한 이재명과 같은 50대다. 국민의힘으로서는 2002년 노무현이 ‘변화’로 보이고 이회창이 ‘기득권’으로 비친 구도를 피할 수 있는 좋은 카드다. 실력으로 이룬 ‘수석 인생’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홍준표와 더불어 그도 ‘밑에서 올라온’ 정치인이다. 민주화운동 경력과 민주당과 다섯 번 싸워 모두 이긴 것도 어필할 수 있는 이력이다.

이번 대선도 ‘아웃사이더’가 ‘주류 엘리트’에 맞서 이긴 2002년 대선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성민

[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주류 엘리트와 아웃사이더 대결’ 2002 대선이 아른거린다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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