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대기업에 밉보여 거래 끊길라···중기 '납품대금 조정신청' 0건읽음

박광연 기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대기업 물류업체에 골판지로 만든 포장용 상자를 납품하는 중소기업 A사는 코로나19가 퍼진 지난해 공급 물량이 10% 가까이 증가했지만 대금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비대면 문화 확산으로 택배 수요가 늘며 골판지에 들어가는 ‘원지’ 가격이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45% 가량 올랐는데도 대기업 측에서 그만큼 납품 대금을 인상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대금 조정을 신청할지 검토했으나 “업계에서 ‘골치아픈 업체’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주변 우려에 따라 신청을 포기했다.

승강기 제조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 B사는 미·중 무역갈등 속에서 부품 제조에 들어가는 철광석 가격이 50% 올랐지만 비용 상승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B사 관계자는 “대기업에서 대금을 올려주지만 인상폭이 크지 않아 흉내만 내는 수준”이라며 “중기중앙회의 대금 조정 제도를 간절히 활용하고 싶지만, 대기업에 신원이 노출돼 보복당할까봐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갑을 거래관계에서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문제를 개선하겠다며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중소기업중앙회의 납품대금 조정 제도가 유명무실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23일 공정거래위원회와 중소벤처기업부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중소기업이 “대기업 납품 대금을 조정해달라”며 중기중앙회에 신청한 건수는 제도가 시행되고 지난 6개월간 한 건도 없었다.

중기중앙회가 중소기업 대신 대기업과 납품 대금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한 해당 제도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 개정으로 지난 4월 시행됐다. ‘을’인 중소기업이 ‘갑’인 대기업에게 직접 납품대금 조정을 요구하기 힘든 거래 현실을 반영했다. ‘갑’ 사업자에 대한 제재보다는 ‘을’ 사업자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에 방점을 두고, 중소기업을 대신해 대기업과 협상하는 주체를 중소기업협동조합에서 중기중앙회로 격상시켰다. 현 정부가 내세운 대표적인 갑을 거래관계 개선 정책으로 평가된다.

코로나19 위기에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자 중기중앙회의 대금 조정 제도가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됐다. 중기중앙회가 협동조합을 꾸린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지난 6~7월 조사한 결과를 보면, 대기업에 공급할 제품 생산에 들어갈 주요 원자재 구매 가격은 지난해 말보다 평균 28.0% 올랐다. 중소기업 입장에서 납품 비용 부담이 커지며 대기업에 대금 인상을 요청할 필요성이 늘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중기중앙회에 납품대금 조정 신청이 전무했던 원인으로 중소기업들은 ‘신청주의’를 꼽는다. 중소기업이 중기중앙회에 직접 대금 조정을 신청해야 하는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신원 노출에 따른 대기업과의 거래 단절 우려 때문에 신청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소 레미콘 업계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납품 대금을 인상할 필요가 있다는 증빙 자료를 익명으로 중기중앙회에 제출한다고 해도, 대기업이 협상 과정에서 거래 조건을 보고 해당 중소기업이 어디인지 알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김진무 한국골판지포장산업협동조합 전무이사는 통화에서 “거래를 단절당하는 것보다는 대금에 손해를 보더라도 거래를 유지하며 고정 물량을 소화하는 게 낫다”며 “제도의 필요성은 매번 느끼나 신원 노출 우려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다.

중기중앙회 조사에서 ‘대금 조정을 신청할 의향이 없다’고 응답한 437개 중소기업들도 주요 이유로 ‘위탁기업(대기업)과 원만한 거래관계 유지’(65.7%)와 ‘거래단절 우려’(27.0%) 등을 꼽았다. 중소기업이 다수 대기업에 납품하는 일부 업종의 특성을 감안하면 거래 업체별로 일일이 대금 조정을 신청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상 예고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1년과 2013년 하도급법 개정으로 중소기업협동조합에 대금 조정 신청권과 협의권이 부여됐지만, 중소기업이 직접 신청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실적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지난 10년간 협동조합에 대금 조정을 신청한 건수는 1건”이라며 “조정이 성립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중기중앙회나 협동조합이 중소기업의 신청 없이도 대기업과 자체적으로 대금 조정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원자재 가격 인상은 업계 전반에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인 만큼, 굳이 개별 중소기업에 대금 조정 신청 부담을 전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물가 변동에 따라 납품 단가를 자동으로 조정하는 납품단가 물가연동제 도입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부정적이다. 중기중앙회나 협동조합이 독자적으로 대금 조정에 나서는 방안은 “협상권이 남발될 우려”(공정위), 납품단가 물가연동제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중기부)이라는 입장을 전해왔다고 신 의원실 관계자는 밝혔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 의원실 제공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 의원실 제공

신 의원은 “기업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중소기업을 대변하는 단체가 조정 협의에 직접 나설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기중앙회 납품단가조정위원장인 김남근 변호사는 “문재인 정부가 경제적 약자들이 단결해 거래 조건을 개선하도록 제도 개혁에 나섰지만, 불완전한 상태로 개혁이 중단돼 거래조건을 실제로 개선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훈련 지시하는 황선홍 임시 감독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라마단 성월에 죽 나눠주는 봉사자들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선박 충돌로 무너진 미국 볼티모어 다리 이스라엘 인질 석방 촉구하는 사람들 이강인·손흥민 합작골로 태국 3-0 완승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