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는가…그들 ‘군인 대통령’을 가른 차이

박성민

대통령의 시대가 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별세라는 단어를 고르는 데 많은 생각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12·12쿠데타와 5·18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유족은 “저의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유언처럼 전했지만 충분한 사죄가 못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바로 그것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결정적으로 갈랐다. 정부의 국가장 결정과 유족의 진정성 있는 사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의 마음은 ‘민족사의 먼 여정에 꼭 필요한 일’이다. 노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이 지난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별세라는 단어를 고르는 데 많은 생각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12·12쿠데타와 5·18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유족은 “저의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유언처럼 전했지만 충분한 사죄가 못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바로 그것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결정적으로 갈랐다. 정부의 국가장 결정과 유족의 진정성 있는 사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의 마음은 ‘민족사의 먼 여정에 꼭 필요한 일’이다. 노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이 지난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주 화요일 약속 때문에 서울광장을 지나는데 “박정희 대통령님 정말 그립습니다”라는 현수막 옆에 우리공화당이 설치한 ‘구국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 각하’라고 쓰인 추모분향소가 있었다. ‘아, 오늘이 10월26일이구나.’

내 시선을 끈 것은 야외에 전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대통령이었던 그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대통령이었으므로 내게는 전제군주 같은 존재였다. 그의 비극적 죽음을 들었을 때의 두려웠던 기억이 또렷하다. 사진 속에는 무서운 독재자 박정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인간 박정희’가 보였다. ‘유신 시대’가 아니라 그저 나의 10대 시절이 떠올랐다.

그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 쿠데타로 군인의 시대를 연 박정희와 군인의 시대를 마감한 노태우가 한날 죽었다니 묘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별세라는 단어를 고르는 데 많은 생각을 했다. 서거했다, 돌아가셨다, 사망했다, 죽었다 중에서 고를 수도 있었다. 나는 김대중·노무현·김영삼 대통령 때는 망설임 없이 ‘서거했다’고 썼다. 정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결정했다. 그러니 ‘서거’가 맞다. 다시 써야겠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박정희 죽은 날에 떠난 노태우
군인의 시대 열고 닫은 두 사람
같은 날 세상 뜨다니 ‘묘한 느낌’

내가 태어난 이후 대통령 10명 중 6명이 서거했다. 박정희·김대중은 ‘국장’, 최규하·노무현은 ‘국민장’, 김영삼·노태우는 ‘국가장’이다. 1967년 제정된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과 국민장으로 구분돼 있었으나 2011년 ‘국가장법’으로 통합했다.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고 국가장으로 결정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조문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별세와 서거 사이에서 고민했듯 문재인 대통령도 직접 조문을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내가 살았던 10명 대통령 시대를 되돌아본다. 박정희(1917년)·최규하(1919년)는 1910년대에 태어났고, 김영삼(1927년)·김대중(1924년)은 1920년대에 태어났다. 전두환(1931년)·노태우(1932년)는 1930년대에 태어났고, 노무현(1946년)·이명박(1941년)은 1940년대에 태어났다. 박근혜(1952년)·문재인(1953년)은 1950년대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1960년대생일까? 나는 박정희·최규하 시대에 10대, 전두환·노태우 시대에 20대, 김영삼·김대중 시대에 30대, 노무현·이명박 시대에 40대를 보냈고, 박근혜·문재인 시대에 50대를 보내고 있다.

프랑스 작가 장폴 뒤부아는 <프랑스적인 삶>이라는 소설에서 한 프랑스 남자의 자화상을 다섯 번이나 바뀐 정권의 변천사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냈다. 책의 목차가 인상 깊다. 1. 샤를 드골 2. 알랭 포에르(1) 3. 조르주 퐁피두 4. 알랭 포에르(2) 5.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6. 프랑수아 미테랑(1) 7. 프랑수아 미테랑(2) 8. 자크 시라크(1) 9. 자크 시라크(2) (알랭 포에르는 최규하처럼 짧은 권한대행을 두 번 지냈다)

이런 제목, 이런 목차의 소설이라면 한국이 제격이다. <한국적인 삶>이라는 소설의 목차가 1. 박정희 2. 최규하 3. 전두환 4. 노태우 5. 김영삼 6. 김대중 7. 노무현 8. 이명박 9. 박근혜 10. 문재인으로 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이들이 우리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프랑스와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언젠가는 내가 살았던 시대를 <한국적인 삶>이라는 글로 정리하고 싶다.

나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 중앙일보에 ‘양김의 화해’라는 글을 기고했다. “… 김대중. 살아서 이미 역사가 된 인물. 상고를 나온 호남 출신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의지와 집념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대통령과 노벨상을 모두 얻은 사람. 대한민국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그를 끔찍이 좋아하는 사람과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 이 나라에서 그의 이름은 사람을 가르는 선이다. 그런 그가 그를 수식했던 ‘정치인’ ‘재야인사’ ‘대통령’을 벗고 ‘인간 김대중’으로 돌아와 말없이 누워 있다. … 김영삼. 이름의 대중성(?)과 영향력에서 한 치의 밀림도 없는 김대중의 라이벌. 그도 이미 역사다. 서울대를 나온 영남 출신으로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대통령이 된 사람. 대한민국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을 김영삼·김대중 순으로 부르는 사람과 김대중·김영삼 순으로 부르는 사람, 그리고 호칭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날까 봐 그냥 양김으로 부르는 사람. 보수와 진보, 영남과 호남을 가르는 세로축과 가로축에 그 유명한 애칭, YS와 DJ가 있다. … 그들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국민의 진한 아쉬움 속에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끔찍한 상상이긴 하지만 그들이 민주화의 도정에서 죽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영웅으로 죽는 것’보다 ‘영웅으로 삶을 마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여든을 훌쩍 넘긴 그들 삶의 공과 과를 써 내려간다면 공의 줄보다 과의 줄이 더 길 수도 있겠지만 무게를 달아보면 공 쪽으로 기울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 많은 사람이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시대를 끝내고 싶어 했지만 어느 정치인도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도전정신, 의지, 헌신, 용기, 역사인식, 소명의식, 정치력, 업적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국민의 기립 박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보다 두 달 전인 2009년 6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에는 ‘죽음 이후의 몇 가지 어지러운 생각’이라는 칼럼을 썼다. “노무현다운 죽음이었다. 유서는 그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연상시켰다. 이순신의 비장한 최후. 타살로 해석되는 자살, 자살로 해석되는 타살. 그는 정말 이순신을 따르고 싶었을까? 그는 ‘불의의 죽음’으로 신화를 완성한 링컨도 좋아했다. 그는 자신도 죽어야 산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죽어서 다시 태어났다. 5월23일 이후 나라는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 노무현’으로 뒤덮였다. 그러자 ‘대통령 노무현’은 죽고 세상을 향해 분노했던 ‘서민 노무현’이 되살아났다. 서민들은 슬퍼했고 분노했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이 ‘인간 노무현’을 감출 수 없었듯 ‘인간 노무현’도 ‘대통령 노무현’을 지울 수는 없다. … 미국 대선에서 패한 매케인은 ‘오바마는 나의 대통령이다’라고 선언했다.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다. 이명박은 나의 대통령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노무현도 나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봉하 마을에 작은 비석 하나는 세우되 나는 그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는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공으로 덮을 수 없었던 과오들
“과오에 용서 바란다” 전했지만
충분한 사죄가 못되는 건 분명

그 이후에도 나는 (유족이 동의한다면) 언젠가는 현충원으로 모셨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유족과 지지자들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국민통합을 위해 그게 좋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애국은 시효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가 있다. 위대한 인물도 ‘돌이킬 수 없는 과오’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한다. 얼마 전 코로나19로 별세한 콜린 파월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이자 최연소 합참의장으로 1991년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다. 2001년에는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흑인 최초로 국무장관으로 기용돼 2005년 1월까지 대외정책을 주도했다.

합리적이고 온건한 그는 미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여러 번 공화당 대선 후보로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파월의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당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보유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그는 2005년 ABC방송과 인터뷰하면서 “이는 오점이고 항상 내 경력의 일부가 될 것이며, 이 때문에 지금도 고통스럽다”고 괴로워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8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콜린 파월처럼 “그 잘못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유족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유언처럼 전했지만 충분한 사죄가 못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전두환과 달랐던 그
아버지 대신해 5·18 희생자에
사과 전한 아들…추징금 완납

정부 국가장 결정·유족의 사죄
이를 받아들이는 국민의 마음
민족사의 여정에 꼭 필요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고, 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씨가 조문한 것은 병석에 누운 자신을 대신해 아들이 5·18 묘역을 여러 차례 참배하고,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는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달리 추징금을 완납했고, 1987년 국민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이라는 점도 사유가 됐을 것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시절 큰 고초를 겪은 민주화운동가 출신 김부겸 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의 따뜻하고 품격 있는 조사가 더 빛났다. “오늘 우리는 노태우 전 대통령님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고 있습니다. 재임 시에 보여주신 많은 공적보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고인께서 유언을 통해 국민들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죄와 용서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님이 우리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 대통령님의 가족께서 5·18 광주민주묘지를 여러 차례 참배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고인께서 병중에 드시기 전에 직접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만나 사죄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남습니다. … 우리는 국가장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떤 사죄로도 5·18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되신 영령들을 다 위로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오늘의 영결식은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이자 새로운 역사, 진실의 역사, 화해와 통합의 역사로 가는 성찰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김부겸 총리가 조사 마지막에 밝혔듯 정부의 국가장 결정과 유족의 진정성 있는 사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의 마음은 ‘민족사의 먼 여정에 꼭 필요한 일’이다. 지금은 분노와 증오로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지만 먼 훗날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도 공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외적으로는 냉전 이후 전환기의 기회 포착과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이행기 관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6·29선언으로 새로운 헌법에 기반을 둔 ‘1987체제’가 태어났다.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하고 상대를 ‘죽일 적’이 아니라 ‘이길 경쟁자’로 보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직선제를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체제로 이행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진전이었다.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후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소련과 중국을 포함하여 45개국과 수교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긴장과 대립의 남북관계를 공존과 평화의 관계로 진전시키는 전기도 마련했다. 토지공개념 도입과 지방자치제 부활도 업적이다.

그는 쿠데타 주역이라는 원죄, 36.6%의 낮은 득표율, 그리고 여소야대라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3당 합당’을 단행하는 담대함도 있었다.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요즘 정치인과 비교해볼 때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정치의 본령도 체화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평가받아야 할 점은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결정적으로 갈랐다.

이제 한국의 대통령은 메시아나 영웅의 아우라는 고사하고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지도자의 이미지도 거의 상실했다. 대통령은 더 이상 우리를 이끌지 못한다. 이제부터는 지도자 없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 대통령의 시대는 끝났다. 다만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선판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나는 두려울 뿐이다.

■박성민

[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는가…그들 ‘군인 대통령’을 가른 차이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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