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에 눈감고···또 표만 본 여야읽음

조해람 기자

법사위 차별금지법의 심사기한
21대 국회 마지막 날까지로 연기
심사완료 안 되면 자동 폐기 우려

24년 전 법 제정 첫 공론화 이후
변변한 논의 없이 제자리걸음만

차별금지제정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국회, 정당 대상 차별금지와 평등법에 대한 입장과 계획 공개질의’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차별금지제정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국회, 정당 대상 차별금지와 평등법에 대한 입장과 계획 공개질의’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형숙씨(54)가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타자 볼멘소리가 나왔다. 젊은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왜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서 다른 사람들 출근을 방해하느냐”고 했다. 이씨도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을 뿐인데, 휠체어가 차지하는 공간 때문에 졸지에 방해자가 된 것이다. 이씨는 “다수가 당연하게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평등권조차 누군가에게는 너무 힘든 상황이 있다”며 “평등과 안전을 위해 법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지지부진한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에 화가 난다는 그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법이) 언젠가 통과되겠지만 미뤄지는 동안 소수자는 그만큼 더 힘들어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 곳곳에 있는 차별을 법으로 규제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또 미뤄졌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의 심사기한이 지난 9월에 이어 또 한 차례 연기된 것이다. 지난 9일 법사위는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법사위에 회부된 이 청원의 심사기한을 21대 국회 마지막 날인 2024년 5월29일까지 연장하기로 만장일치 의결했다. 박광온 법사위원장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심도 있게 심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21대 국회 마지막 날까지 심사가 완료되지 않으면 청원은 자동 폐기된다.

그러나 국회는 국민동의청원과 별개로 이미 제출된 차별금지법안들조차 제대로 논의한 적이 없다. 국회가 이번에 차별금지법 심사기한을 연장한 것을 두고 “껄끄러우니 일단 미뤄놓고 보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다.

논의 자체를 회피해놓고 정작 논의 시한이 닥치거나 법안을 심사 할 때가 되면 ‘국민 여론’ ‘사회적 합의’ ‘역차별 소지’ 등을 핑계로 다시 공론화를 미루는 행태가 반복됐다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1997년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제정을 주장한 이후 꾸준히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한 번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난 19대 국회까지 차별금지법은 7차례 발의됐지만 모두 소관 위원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는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이 처음 공론화한 지 24년째 제자리걸음인 셈이다.

차별금지법안 4개가 제출된 21대 국회에서도 논의는 뒷전이었다. 14일 국회에 계류된 차별금지법 4개 법안(장혜영·이상민·박주민·권인숙안) 중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회의록이 등록된 법안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6월 대표 발의한 법안이 유일하다. 장혜영안이 논의된 지난해 9월21일 법사위 전체회의 대화는 총 13만6000자 분량인데, 이 중 차별금지법 논의 분량은 2.8%인 3800자에 그쳤다. 그나마 장 의원의 제안설명을 제외한 나머지 법사위원들의 논의 기록은 1700자에 불과했다.

사회 각계는 차별금지법 제정 의지가 없는 정치권을 비판한다. 지난달 부산에서 출발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도보행진단은 지난 10일 서울 국회의사당에 도착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 걸음씩 내딛는 동안 국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구체적인 논의를 지금 바로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도 “국민의 준엄한 요청을 받아 국회가 입법 절차를 조속히 진행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도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질타했다. 국제법률가위원회·국제앰네스티·국제인권연맹·국제성소수자협회 등은 11일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은 다양한 이유에 따른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치”라고 밝혔다.

인권위가 지난해 실시한 국민인식조사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88.5%로 나타났다. 정치권이 대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해 보수 기독교계 등의 반대 여론을 과도하게 신경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미 법안이 4개나 제출돼 있는데도 아무 논의가 없는 것은 국회의 직무유기”라며 “국회가 선거공학적 사고에 빠져 표를 계산하느라 시대적 당위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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