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양당의 ‘현수막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탁지영 기자    문광호 기자

“정치부 기자들이 전하는 당최 모를 이상한 국회와 정치권 이야기입니다.”

지난 15일 국회의사당 앞 횡단보도에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 있다. 탁지영 기자

지난 15일 국회의사당 앞 횡단보도에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 있다. 탁지영 기자

거대 양당이 ‘현수막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국회의사당 주변만 해도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을 합해 10개 가까이 찾아볼 수 있다. 양당은 현수막을 나란히 또는 위아래로 걸면서 당 홍보에 열 올리거나 상대 당 깎아내리기에 바쁘다. 국회 안에서의 기싸움이 의사당 밖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현수막에 담긴 정치학

현수막은 정당의 가장 기본적인 여론전 수단이다. 당원이 아니더라도, 정당을 후원하지 않아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지 않아도, 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볼 수 있다. 당원 게시판 등 온라인 공간에서 정치적 요구를 하는 열성 지지층이 아닌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다보니 문구를 정하는 데 고려할 지점이 많다. 각 정당의 전략, 홍보, 정책 담당자들이 모여 ‘이 주의’ 의제를 정한다. 정치 현안을 다루기도 하고 예산이나 주력 법안 등 정책 의제를 담기도 한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처럼 국가적 이벤트도 간간이 다룬다.

시각적 요소로서 글자 수는 매우 중요하다. 민주당 홍보위원장인 한준호 의원은 30일 통화에서 “차로 서행할 때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정도를 지향한다”며 큰 글자 기준 10자 미만으로 잡는다고 밝혔다. 10자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작은 글씨를 추가한다. 이렇게 중앙당에서 문구를 정한 뒤 시안을 각 시·도당 또는 지역위원회에 보내면 전국에 현수막이 걸린다.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 쓰는 언어가 달라지기도 한다. 야당은 정부 비판적인 현수막을 많이 붙이는 반면 여당은 성과를 강조한다. 김수민 국민의힘 홍보위원장은 통화에서 “민주당은 거대 야당으로서 해야만 했던 부분들은 방기하고 국민의힘 네거티브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양상”이라며 “국민의힘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켰다’ 등 네거티브보다 긍정적인 언어를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당 색깔을 딴 ‘국민의힘은 빨간색, 민주당은 파란색’ 공식이 깨진 현수막도 있다. 상대를 비판하거나 탓하는 글씨에 상대편의 색을 쓰거나 로고를 입힌다. 현수막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색깔로 각인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지난 28일 국회의사당 앞에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이 걸려 있다. 탁지영 기자

지난 28일 국회의사당 앞에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이 걸려 있다. 탁지영 기자

“민주당이 해냈습니다! 납품단가연동제법 통과!”(12월9일) → “2023 예산안의 진실! 민주당 국민감세 VS 윤·국힘 초부자감세”(12월12일) → “2023 민생예산 민주당이 확보했습니다! 지역화폐 3525억 반영!”(12월24일)

“민생뒷전 방탄국회 규탄! 민생보다 그분이 먼저입니까?”(12월12일) → “국민과의 약속 실천 ‘만 나이’로 통일”(12월12일) → “소상공인을 힘나게! / 소상공인 대출이자 부담 경감 / 신보 800억원 신규반영!”(12월24일)

12월 한 달 동안 걸린 양당의 주요 현수막 문구를 정리했다. 지난 9일 정기국회 회기가 끝나자 각 당은 법안 성과를 내세우는 데 주력했다. 내년도 예산안 협상을 둘러싼 여야 기싸움이 길어지면서 ‘네 탓’ 공방하는 현수막이 즐비했다. 지난 23일 예산안이 처리된 뒤에는 당마다 예산을 확보했다는 치적성 현수막을 걸었다.

정당이 현수막을 포기하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특정 이슈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국민의힘은 “민생보다 그분이 먼저입니까”를 통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장동 사건을 겨냥해 ‘민주당은 방탄세력’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자 했다. ‘정영학 녹취록’에 등장한 ‘그분’이 이 대표라는 의혹을 활용했다. 민주당은 “이것이 공정입니까? 야당대표 224 : 0 대통령·부인” 현수막으로 압수수색의 불공정을 압축해 표현했다. 윤석열 정부가 검찰을 앞세워 야당을 탄압한다는 프레임을 극대화했다.

왜 ‘현수막 정치’에 열 올리나

민주당은 이 대표 취임 후 현수막 정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도부 소속 한 의원은 통화에서 “언론 지형이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도층에 민주당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알리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홈페이지를 보더라도 이 대표 취임일인 지난 8월28일 이후부터 일주일마다 새 현수막 홍보자료물이 올라온다. 이전 지도부 체제에선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을 넘는 등 주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 대표가 적극 지시하기도 한다. 이 대표는 지난 9월2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조정식 사무총장이 민생예산 확보 등이 담긴 현수막 시안을 들어보이자 “글자가 너무 많고 꽉 차서 답답하다. 차 타고 휙 지나가는데 잘 안 읽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복수의 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민주당 중앙당에서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등 험지에 지원하는 홍보비도 늘었다고 한다. 민주당 부산시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이 대표가 ‘어려운 지역의 경우에 현수막을 더 잘 달 수 있도록 중앙당에서 예산 지원을 더 하라’고 했다”며 “현수막 예산이 2배쯤 는 것 같다. 부산이 예전보다 현수막 정치가 굉장히 활성화됐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 앞 사거리에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탁지영 기자 사진 크게보기

지난 22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 앞 사거리에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탁지영 기자

국민의힘도 질세라 경쟁하고 있다. 양당 모두 상대 현수막에 잘못된 내용이 담기면 그 위나 아래에 반박성 현수막을 붙인다.

여야가 내년도 예산안 협상으로 줄다리기를 하던 지난 17일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SNS에 사진을 올렸다. 배 의원 지역구인 서울 송파을 곳곳에 양당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서울 교육청 예산 5688억원을 삭감했다’는 내용이었고, 국민의힘은 이 현수막이 거짓말이라며 ‘작년보다 서울 교육청 예산이 2조3029억원이 증가했다’고 담았다. 김수민 국민의힘 홍보위원장은 “민주당이 허위사실을 현수막에 유포할 경우 보는 즉시 신고를 하거나 그 위에 대형 현수막을 달라고 가이드를 내린다”고 했다.

소모전을 불사하면서까지 붙이는 현수막이 유권자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까. 양당 관계자는 “그렇다”고 입을 모았다. 한준호 민주당 홍보위원장은 “속시원하게 붙이면 당원이나 지지자분들이 반응을 크게 한다. (초부자감세의 경우) ‘어느 정도가 초부자냐’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은연 중에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현수막은 있는데 민주당이 없으면 ‘우리도 대응해야 한다’는 당원 문자가 쏟아진다고 한다.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출퇴근길에 보는 현수막을 통한 내용 전달이 효과가 있다”고 했다. 김 홍보위원장도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고 했다.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민도 있다. 서울 한 지역구 현수막 제작업체 사장 A씨는 통화에서 “서로 내로남불”이라며 “내용을 봐도 누구 말이 맞는지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국민들한테 따뜻한 희망을 주거나 힘을 실어주는 내용은 없고 자기 정당 홍보하기 바쁘다”고 비판했다.

열외된 소수정당···환경 문제는?

현수막 한 장당 제작 비용은 약 10만원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상 지역구 253개에 하나씩만 건다 해도 2500만원이 훌쩍 넘게 든다. 당원 수가 적은 소수정당이나 원외정당이 양당의 현수막 전쟁에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다. 국회의사당 앞만 봐도 정의당은 지난 23일까지 ‘손해배상 폭탄 방지! 노란봉투법 즉각 제정하라’ 현수막 하나만 걸어뒀다.

정의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재정 문제가 만만치 않다. 인쇄·디자인 비용뿐 아니라 현수막을 거는 인건비 등을 포함하면 비용 규모가 꽤 크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정의당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탁지영 기자

지난 22일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정의당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탁지영 기자

원외정당 중에서도 지역정당은 양당의 현수막 전쟁을 ‘기성정당의 기득권 싸움’으로 바라본다. 이용희 직접행동영등포당 대표는 통화에서 “(기성정당은) 현수막에 국회의원 얼굴을 넣는 등 본인을 알릴 수 있는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며 “작은 정당일수록 보편적인 전달 체계가 없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지난 6월 개정돼 지난 11일부터 시행된 개정 옥외광고물법(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책이나 정치 현안을 다룬 정당 현수막은 최대 15일까지 게시할 수 있다. 15일이 지나 철거된 현수막은 지자체에서 낙엽 등을 담는 봉투로 쓰기도 하고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 도장시 바닥재로 재사용한다. 밭에 씌워두면 잡초가 자라지 않아 잡풀 제거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재활용 비율이 낮은 수준이라 상당수 현수막은 폐기 처분된다. 전국적으로 현수막 쓰레기가 양산되는 셈이다.

현수막을 만드는 주체인 정당이 적극적으로 고민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A씨는 “현수막도 ‘산업 폐기물’인 건데 각 정당에서 심도 있게 (재활용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 관계자들은 환경 문제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지금으로선 현수막만큼의 효과를 낼 다른 수단이 없다고 토로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한 번 쓰고 버린다는 문제를 점점 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도“현수막의 대체재를 아직 찾지 못한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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