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찬탈 위해 수단 가리지 않은 전두환…숨질 때까지 사과 없었다읽음

정대연 기자
권력 찬탈 위해 수단 가리지 않은 전두환…숨질 때까지 사과 없었다

‘정치 군인’ 전두환(全斗煥). 군사 독재자였던 그가 한국 현대사 전면에 나선 시기만큼 민주화는 지체됐다. 전씨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쿠데타, 시민 학살 등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2205억원에 이르는 추징금 가운데 956억원도 결국 미납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야기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박종철·이한열 열사 사망 사건 등은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화 진전에 큰획을 긋는 사건으로 남았다.

전씨는 1931년 1월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학하면서 정치 군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사 2기 동기인 이규동씨의 딸 이순자씨와는 1959년 결혼했다.

전씨는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육사 후배들의 쿠데타 지지 행진을 주도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의 눈에 든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등 요직을 거치며 권력 중심부로 점점 다가갔다. 1979년에는 국군 보안사령관에 임명됐다.

1964년 전씨가 주도해 결성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 군사 정권의 친위 부대 역할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육사 11기가 주축이 된 하나회는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라진 뒤에는 정권을 차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태 수사를 맡은 전씨는 12·12 쿠데타를 통해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을 장악했다. 1980년 5월17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염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튿날 공수부대를 투입해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후 전씨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해 국정을 장악했고, 결국 19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에 올랐다. 유신헌법에 의해 만들어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것이었다. 그해 10월 7년 단임제의 새 헌법을 제정한 뒤 이듬해 3월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대통령선거인단 간접선거를 통해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씨는 대통령 임기 중 언론 통폐합, 보도지침 등을 통해 언론을 탄압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억압했다.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인권을 탄압했다.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걷어 막대한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서울 아시안게임·하계올림픽을 유치하고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정책을 취하기도 했지만, 3S(스포츠·스크린·섹스)로 상징되는 우민화 일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임기 말인 1987년 1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고, 같은해 6월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이는 6월 항쟁을 불러왔다. 전씨는 4·13 호헌조치로 5공 연장을 노렸지만, 전국적인 시민 반발로 결국 그해 6월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전씨는 다음해 2월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 후 전씨에게는 과오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이뤄졌다. 친구이자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지만 여소야대 국면 속에 국회에서는 5공화국 비리와 5·18 진상조사 목소리가 커졌다. 1988년 11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부인과 백담사로 떠난 그는 1989년 12월 국회 증언대에 섰다. 하지만 자신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하나회 해체와 과거사 청산을 내걸고 전씨와 노씨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 심판대에 올렸다. 1995년 12월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간 전씨는 내란목적살인, 내란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전씨는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김대중 후보가 승리한 1997년 12월 대선 직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씨와 노씨를 사면 복권해 이들은 구속 2년 만에 풀려났다.

전씨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도 5·18을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최초 발포 명령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전 재산이 29만원에 불과하다며 추징금 납부를 거부했다. 이는 함께 쿠데타를 저지른 노태우 전 대통령과도 대비되는 대목이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조 신부의 유족은 전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2019년 22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선 전씨는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었다. 전씨는 지난 8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정 진단을 받았고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전씨는 결국 법적 심판을 받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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