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이태원참사 특별법(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을 공포하지 않고 국회로 되돌려 보낸데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정쟁’의 틀로 인식하는 시각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참사 직후부터 정치적 책임론, 야당과 유가족이 요구하는 진상규명 방식에 선을 그었고, 논란은 1년 3개월간 지속돼왔다. 정부가 일방적 종결을 추진하면서 오히려 ‘정쟁’을 장기화하고 통합과 위무 역할을 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거부권 행사는 예견된 일이다. 여기에는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이미 처리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담겼다. 이날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의 브리핑에도 “진상규명이 검·경 수사와 국정조사, 헌재 탄핵심판 선고 등을 거치며 정상적으로 진행돼 왔다”, “진상 규명, 원인 규명만큼은 정부가 최선을 다해서 했다”는 발언이 지속적으로 나온 데도 이같은 인식이 반영돼 있다.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과도한 권한과 정부 역할 침해 등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기저에는 총선을 앞두고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이슈가 다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는 속내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참사로 인한 아픔이 정쟁이나 위헌의 소지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며 ‘재난의 정쟁화’를 언급했다. 야당 주도로 통과된 특별법에 따라 특조위가 꾸려지면 총선에서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쟁화를 경계한다고 했지만 윤 대통령과 정부의 행태가 참사를 둘러싼 정쟁과 분열을 가속화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159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참사 직후부터 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등을 통한 명시적 사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 책임자 처벌,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여당 내에서도 사법 책임과 구분해 정치적 책임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 수사기관을 통해 사법적 책임을 가려내는 것으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범위를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책임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는 건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2022년 11월 7일)이라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정치적 책임론에 선을 긋고 사법적 처리로 책임 범위를 제한하면서 이는 헌정사상 초유로 이 장관이 국무위원 탄핵심판을 받는 사태로 나아갔다. 이는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지만 사태 책임을 제한적으로 바라보고 유가족 요구를 외면한 정부 역시 패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명시적 사과나 유가족 대표단과의 면담도 이뤄지지 않았다. 검·경 수사를 통한 진상규명은 국민적 동의와 지지를 받지 못한 채로 이뤄졌다. 정부에 의한 일방적 진상규명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수사 결과 역시 신뢰를 받지 못하며 ‘꼬리 자르기’ 비판이 이어졌다. 야당과 유가족이 지속적으로 추가 진상규명을 요구한 데도 이같은 상황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서도 이태원 참사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취임 1주년 전후로 그간의 국정운영을 돌아보는 소회를 수차례 밝힐 때도 참사 관련 언급은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실이 배포한 ‘취임 1년간 이뤄낸 변화’ 책자에도 이태원 참사 관련 성찰과 재발방지책 등은 언급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이후 지속적으로 아픔을 위무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당이 특별법과 관련해 추가 협상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전향적 수용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총선 과정에서 여론의 부담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태원참사 특별법은 윤 대통령이 취임 후 거부권을 행사한 9번째 법률안이다. 쌓여가는 거부권 행사 횟수는 윤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더해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지난 5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관련 특검법안을 거부한 지 한 달도 안돼 이태원 참사 특별법안을 거부하면서 일방주의적 국정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