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16)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2015.07.20 22:37 입력 2015.07.20 22:38 수정

박정희 “불균형발전”, 김대중 “균형발전”… 71년 대선 공약 맞대결

▲ ‘국가 주도’ ‘자립경제’ 등
같은 뿌리서 출발했지만
산업화·민주화세력 나뉘어
정치사회 경쟁 시작

▲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론’
절대빈곤 벗어나는 성과
정경유착·농업 희생 등 한계

1960~1970년대의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이 일대 격돌한 선거는 1971년 4월27일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였다. 선거가 선거다우려면 인물과 비전의 구도가 제대로 잡혀야 한다. 1971년 대선은 광복 70년 동안 가장 선거다운 선거로 기록될 만하다. 대선에서 경쟁한 두 인물은 박정희와 김대중이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1963년과 1967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3선개헌을 통해 세 번째 집권을 노린 후보였다. 그에겐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 경제발전이라는 성취가 있었다. 김대중은 대선후보 선출에서 김영삼·이철승을 꺾은 ‘40대 기수’의 대표 주자이자 야당의 새 정치를 상징하는 후보였다. 그에겐 4월혁명, 6·3항쟁, 3선개헌 반대투쟁으로 이어진 1960년대 민주화운동이라는 자산이 있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1971년 4월25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1971년 4월25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1971년 4월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1971년 4월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

과거나 현재나 선거를 이끄는 결정적 프레임은 경제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산업화의 경제 프레임으로 ‘조국근대화’와 ‘대중경제’를 각각 내세웠다.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에 대한 비교 연구로는 김일영(전 성균관대 교수·정치학)의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2006)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 모두 ‘내포적 공업화론’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두 담론은 자립경제, 국가 주도성, 중공업 발전을 공통분모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점 또한 작지 않았다. 조국근대화론의 핵심은 수출증대·외자의존을 수단으로 세계시장 지향의 발전과 ‘발전국가’로 일컬어지는 국가 주도의 발전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김일영에 따르면, 조국근대화론의 국가 주도성에 담긴 특징은 ①중점적으로 육성할 전략산업을 선택하고, ②외국자본·직접투자를 포함한 국내외 가용 자원을 총동원하며, ③동원된 자원을 전략산업 부문에 편중 배분하고, ④선택과 집중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며, ⑤금융기관을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두고, ⑥성과에 따른 자원의 배분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조국근대화론은 국가 주도의 경제적 불균형발전을 통해 성장을 이루고, ‘낙수효과’를 통해 그 성장의 과실을 사회적으로 나눠 갖자는 발전전략이었다.

대중경제론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의 <김대중 경제사상에 관한 검토>(2010)를 들 수 있다. 대중경제론이 지향한 모델은 국가에 의한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중시하는 한국적 혼합경제 체제이며, 목표는 파행성을 극복한 자립경제의 실현에 있었다. 류동민에 따르면, 대중경제론은 ①축적원천으로 국가자본 및 중소기업 강조와 외국자본의 철저한 국가 관리를, ②투자 주체로는 국영기업의 과도기적 창설 및 민간 불하와 민족적 중소기업 육성을, ③노동정책으로는 노동자의 경영 참가 중시를, ④무역정책으로는 수입대체 모색 등을 내걸었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를 ‘특권경제’로 비판한 대중경제론은 진보 경제학자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1년 대선이 갖는 의의 중 하나는 이런 상이한 경제 패러다임이 경쟁한 선거였다는 데 있다. 수출지향 대 수입대체, 불균형발전 대 균형발전, 대기업 중심 대 중소기업 중심, 산업평화 대 노동자 참여 등은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의 핵심 쟁점이었다. 1971년의 대선은 우리 현대사에서 제대로 치러진 최초의 정책선거였던 셈이다.

치열했던 선거과정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는 총투표의 51.2%를 얻은 반면, 김대중은 43.6%를 획득했다. 95만표 차이였다. 당시 정치·경제적 환경을 고려할 때 김대중은 나름대로 선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5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총 204석 중 113석을 차지한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종전의 44석에서 89석으로 의석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정치사회 안에서 박정희가 주도한 산업화세력과 김대중·김영삼이 주도한 민주화세력 간의 경쟁은 이렇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 조국근대화론의 성취와 한계

1971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경제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 시대 고도성장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과 풍부한 노동력에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가 시장을 창출하고 선도한, 앞서 말한 발전국가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돼 왔다. 금융정책과 노동정책은 박정희 정부 경제정책의 양대 축을 이뤘다. 금융정책의 경우 정부가 만성적인 자본 부족을 겪고 있는 대기업들에 대규모 외국자본 배분은 물론 일반금리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저리의 자본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재벌 대기업 성장의 후견인 역할을 떠맡았다.

노동정책의 경우에는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같은 입법에서 노동운동의 직접적 탄압에 이르기까지 억압적 노동정책 및 노동통제를 통해 산업 평화와 저임금 유지를 도모했다.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 또한 중요했다. 수출지향 공업화의 특징을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방식에 기반을 둔 ‘원시적 테일러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원천이었다.

요약하면,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분업의 재편과정에서 냉전체제와 농지개혁이라는 역사적 조건 아래 국가의 효율적 경제정책과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을 결합시켜 고도성장을 일궈낸,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초대에 의한 반(半)주변적 발전’의 사례를 이뤘다.

조국근대화론의 성취는 통계 지표로 확인된다. 1961년 8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79년 1579달러로 증가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다.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에는 2차산업이 1차산업을 능가했고, 중공업의 비중이 경공업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췄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아파트·텔레비전 등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생활양식을 보급함으로써 사회는 본격적인 ‘모더니티 모험’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조국근대화론의 한계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대외 종속의 심화, 대기업에로의 경제력 집중, 농업 부문의 희생, 재벌의 성장과 함께 공고화된 정경유착 등은 조국근대화론에 내재된 대표적인 그늘이었다. 자원 및 인구, 특히 협소한 내수시장을 고려할 때 조국근대화론이 제시한 수출지향 산업화가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그 불가피성이 ‘모더니티의 그늘’을 모두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대선 직전인 1970년 11월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과 대선 직후인 1971년 8월 광주단지(현 성남시) 주민 폭동은 이런 그늘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 ‘대중경제론’의 변화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16)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

DJ, 대통령 당선 후 민주주의·시장경제 ‘병행발전론’으로… 외환위기 극복 주력


1971년 대선에서 본격 선보인 ‘대중경제론’은 정치가 김대중의 대표 담론이었다. 대중경제론은 1980년대에 ‘대중참여경제론’(사진)으로,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으로 변모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화된 것과 변화되지 않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중경제론의 변화를 연구한 류동민 교수에 따르면 대중경제론이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했다면, 대중참여경제론은 시장의 효율적 기능을 부각시켰고, 병행발전론은 말 그대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회세력 간의 ‘균형’과 ‘참여’를 강조한 기조는 거의 변화되지 않았다.

대중경제론의 최종 정착지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은 산업화세력의 발전국가론에 맞서 김대중과 민주화세력이 제시한 국가 비전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제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도, 한편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고 ‘생산적 복지’를 모색했던 김대중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환위기라는 주어진 조건 아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김대중의 의지가 반영돼 있었다.

“혹자는 나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중략) 그러나 1997년 IMF 체제 이후 우리의 선택은 시장경제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중략) ‘생산적 복지’는 사후적인 복지, 시혜적인 복지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과다 복지가 가져온 유럽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기도 했다”는 김대중의 회고는 민주화세력이 놓인 현실과 추구한 이상 간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진보세력이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려면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을 어떻게 진화시킬 것인가에서 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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