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성희롱’이 사회문제로 인식된 게 언제쯤일까요. 고작 20여년 밖에 안됩니다.
1993년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을 계기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소개됐습니다. 당시 서울대 화학과 우희정 조교가 신정휴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했고, 6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신 교수가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처음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었는데요.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도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성희롱은 개인에게 심리적 고통과 육체적 상해를 입힐 뿐 아니라 노동환경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4월5일 전국 공공기관·민간사업체 직원 7844명과 성희롱 대처업무 담당자 1615명을 대상으로 한 ‘2015 성희롱실태조사’(연구기관 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를 발표했습니다. 한국 직장의 성희롱 실태 어느 정도일까요.
■ 나는 성희롱을 당해봤다
전체 응답자에게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성희롱 피해 경험을 물었습니다.
①성희롱 피해경험
전체 응답자 중 6.4%가 현재 재직중인 직장에서 성희롱 피해를 경험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여성의 성희롱 피해경험 비율은 9.6%로 남성(1.8%)보다 5배 이상 높았습니다. 연령이 낮을 수록 성희롱 피해 경험은 높게 나타났습니다. 20대 7.7%, 30대 7.5%, 40대 4.3%, 50대 이상 2.7%가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직급과 고용형태에서도 일반직원(6.9%)과 비정규직(8.4%)이 관리직(4.6%)과 정규직(6.4%)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희롱 피해 경험이 높았습니다.
‘성별’, ‘연령’, ‘직급’, ‘고용형태’는 성희롱 피해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주 요인입니다. 하지만 ‘관리직’과 ‘정규직’의 성희롱 피해 경험도 높았습니다. 따라서 ‘직급’과 ‘고용형태’ 보다는 ‘성별’과 ‘연령’의 위계에 따른 성희롱 피해 경험이 더욱 핵심적이라고 연구진은 분석했습니다. 회사 고위직이라도 ‘여성’이라면 성희롱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죠.
성희롱 피해는 언어적 성희롱이 주로 많았습니다.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3.9%), ‘음담패설 및 성적 농담’(3.0%), ‘회식에서 술을 따르거나 옆에 앉도록 강요하는 행위’(2.5%)의 순으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시각적 성희롱인 ‘특정 신체부위를 쳐다보는 행위’(1.3%)와 신체적 성희롱인 ‘신체 접촉을 하거나 강요하는 행위’(0.9%) 등도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이었습니다. ‘여성’, ‘20대/30대’, ‘일반직원’의 성희롱 피해 경험이 높았습니다.
성희롱 피해경험 6.4%는 2012년 ‘공공기관 성희롱 실태조사’의 3.8%에 비해 높아진 수치입니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 사회의 성희롱 사건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한 현상으로 연구진은 분석했습니다. 과거 성희롱으로 판단조차 못했던 일상적인 성희롱에 대해 인지하게 되고, 피해 경험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게 됐다는 겁니다.
눈에 띄는 부분은 공공기관 성희롱 피해경험(7.4%)이 민간사업체(6.1%) 보다 높다는 점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공공기관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이 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상과 관련있다고 연구진은 분석했습니다. 내실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이 직원들의 성희롱 민감도를 높인다는 겁니다.
②성희롱 행위자는 누구였나
성희롱 피해 경험 응답자 500명에게 성희롱 행위자의 직급을 물었습니다. 본인보다 ‘상급자’라는 응답(39.8%)이 가장 높았고, ‘하급자’(32.6%), ‘동급자’(15.6%), ‘외부인’(4.0%)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행위자 성별은 대부분 ‘남성’(88.0%)이었습니다.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 성희롱 행위자의 90.8%가 남성, 피해자가 남성인 경우에도 행위자의 67.9%가 남성이었습니다.
③어디서 발생했나
발생 장소는 ‘회식장소’(44.6%)와 ‘직장 내’(42.9%)가 주요 발생 장소였습니다. 남성의 경우 ‘직장 내’(50.3%)를 가장 높게 응답했고, 여성은 ‘회식장소’(46.7%)를 가장 높게 지목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서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여성도 41.9%였으며, ‘회식장소’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남성은 29.2%로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그 외 ‘야유회 워크숍 등’, ‘출장 외부미팅 등’을 답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④어떻게 대처했나
10명 중 8명은 ‘그냥’ 참았습니다. 전체 응답자의 78.4%가 성희롱 피해에 대처하지 않고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습니다. ‘개인적 처리’(6.8%), ‘상급자/동료와의 면담’(4.7%) 등의 개인적 대처도 일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내기구’와 ‘외부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응한 응답자는 전체 0.9%에 불과했습니다.
왜 참고 넘어갔을까요? 먼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라는 응답(48.7%)가 가장 많았고,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48.2%)라는 응답도 높게 나타났습니다. ‘업무 및 인사고과 등의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되어서’(16.2%)와 같은 개인적 불이익에 대한 걱정 때문에 참기도 했습니다. ‘대처 방법을 잘 몰라서’(13.9%)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어서’(6.0%)라는 응답도 나왔습니다.
남성의 72.1%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참고 넘어갔다고 답한 경우가 여성(45.5%)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나머지 모든 항목에서 여성의 응답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서, 여성들이 성희롱 피해 대처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연령이 낮아질수록 불이익에 대한 우려가 커서 20대에서 가장 높았으며, 다른 응답도 높게 나타났습니다. 종합하면 ‘여성’과 ‘20대’가 성희롱 피해 대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반면 ‘남성’과 ‘50대 이상’의 경우 성희롱 피해 자체를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참고 넘어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희롱 피해에 대처한 사람들의 54.4%는 ‘불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만족한다’는 응답은 42.1%에 불과했습니다. 처리결과에 만족한 사람의 다수는 ‘적절한 사과를 받았기 때문에’(74.8%)라고 답했습니다. 반면 불만족한 사람은 ‘적절한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51.0%), ‘징계 등의 조치가 없었기 때문에’(38.4%)라고 답했습니다. ‘사과’가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 다른 사람이 성희롱 당하는 것을 봤다
①타인의 성희롱 피해 인지경험
앞서 질문과 동일하게 물었습니다. 전체 응답자의 13.8%가 ‘현재 재직 중인 직장에서 타인의 성희롱 피해를 전해 듣거나 목격’했다고 응답했습니다. 남성의 9.1%가 타인의 성희롱 피해를 인지했고, 여성은 17.2%가 인지했다고 답했습니다. 연령별로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50대 이상의 경우 인지경험이 낮았습니다.
‘공공기관’(18.7%)이 ‘민간사업체’(12.7%) 보다 인지경험이 많은 점도 눈에 띕니다. 민간사업체 중에는 ‘서비스업’(12~3%~15.2%)의 인지정도가 다른 업종에 비해 높았고, 사업체 규모가 커질수록 인지정도가 높았습니다. 타인의 성희롱 피해인지 경험은 본인의 성희롱 피해와 비슷하게 언어적 성희롱 피해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희롱을 인지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선 실제로 성희롱 사건이 빈번하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사람이 당하는 현장에 있었다는 건 본인도 ‘간접적인 피해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희롱 혹은 성평등 인식 수준이 높다고도 볼 수 있구요. 마지막으로 성희롱 예방교육과 공식적인 처리가 잘 이루어진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②인지경로 및 영향
타인의 성희롱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소문’이 제일 많았네요.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사건을 인지한 경우는 매우 적었습니다.
성희롱 피해를 알게 된 영향은 어땠을까요. 남성은 ‘특별한 영향 없었음’(47.9%)이 가장 많았습니다. 여성은 ‘성희롱 행위자에 대한 반감을 느꼈음’(50.2%)이 가장 높았습니다. ‘나도 성희롱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직장 내 성희롱 예방정책 문화 등에 대한 실망감’, ‘근로 의욕 저하’, ‘퇴사 욕구’ 등 대부분 항목에서 여성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타인의 성희롱 피해로 근무 환경 만족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③조치방안
다른 사람의 성희롱 피해를 알게 되고도 절반 넘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진 않았습니다. 직접 신고한 사례는 1.4%에 불과했습니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남성의 경우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69.6%)가 많았고, 여성은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51.6%)라는 응답이 가장 높았습니다.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라는 응답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높았습니다. 연구진은 “성희롱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조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반직원들이 성희롱 피해와 사건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인식하도록 적극적인 개선 작업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 직장 내 조직문화
평등한 조직문화는 성희롱 예방 및 성희롱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응답한 직원들의 대답에서 한국 직장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4점 만점입니다.
전체 항목 평균은 3.07점으로 대체적으로 평등하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여성’, ‘일반직원’은 상대적으로 불평등하게 평가했습니다. 모든 항목에서 공공기관 종사자가 민간사업체 노동자보다 직장 내 조직문화가 더 평등하다고 인식했으며, 총점도 공공기관 종사자(3.24점)가 민간사업체(3.04)보다 높았습니다.
■ 성희롱 피해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 조치로 오히려 피해자만 피해를 본 경우가 16.9%에 달했습니다. 특히 피해자 5명 중 1명은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피해자만 재직 상태가 변했다는 응답도 7.0%에 달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가 ‘회복적인 해결’을 원하는 경우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회사 차원에서 어떻게 보장하고, 피해자를 보호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 성희롱은 일상 속 구조적 권력 차이의 결과
정리하면, 성희롱 사건이 전반적으로 빈번하다고 하긴 어려우나 꾸준히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는 대체로 여성·20~30대·비정규직 종사자가 많았으며,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상급자였습니다. 하지만 하급자 및 동급자의 비중도 낮지 않아, 직급의 상하관계뿐만 아니라 성별과 나이 등 복합적인 위계가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향후 과제로는 효과적인 성희롱 예방 교육 등 전반적인 시스템 정비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가해자 징계 중심의 사후처리를 넘어 2차 피해방지 및 회복지원 등 다각적인 사후지원 방안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성희롱 적용대상을 노동자로 한정하지 않고 고객 등 직장 외 관계 등으로 확대하고, 비정규직 등도 포함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성희롱 행위 규정의 범위도 확대해야 합니다. 피해자 구제에 있어서도 금전적 보상 외에 정신적 피해보상, 명예회복 조치 등 다양한 구제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