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5년, 혐오를 넘어 ‘확장하는 페미니즘’으로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2020.12.23 13:19 입력 2020.12.23 23:45 수정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8월19일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서울시청 대응 실태 감사>를 위한 국민감사청구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8월19일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서울시청 대응 실태 감사>를 위한 국민감사청구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2020년은 지난 5년간 펼쳐졌던 한국 페미니즘 안과 밖의 갈등이 집약적으로 터져나온 한 해였다.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래디컬 페미니스트(랟펨)의 공격으로 입학을 포기했다. 여성의당이 창당했다. n번방의 디지털 성범죄 행위가 폭로되었다. 아동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의 손정우는 1년6개월 형을 살고 풀려났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거돈 부산시장의 성 비위가 고발됐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했던 정부에서 헌법 불합치 선고를 받은 낙태죄 개정 논의가 해를 넘기게 됐다.

계간 ‘문화/과학’은 2015년 가을 83호 ‘페미니즘 2.0’ 특집 기획을 통해 페미니즘 담론 형성에 적극 개입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20년 겨울 104호에선 ‘확장하는 페미니즘’을 제시한다. 소수자를 혐오하거나 사이버불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연대를 통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사상이자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5년, 혐오를 넘어 ‘확장하는 페미니즘’으로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메갈리아’와 미러링 등 여성혐오에 맞선 페미니즘의 부상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8년 ‘미투’ 운동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손희정 경희대 연구교수는 2015년 ‘문화/과학’을 통해 온라인 공간에서 촉발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을 ‘페미니즘 리부트’로 처음 명명했다. 신자유주의시대 ‘각자도생’에 내몰린 여성들이 페미니즘 안에서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차별과 억압을 포착하고 저항한 것으로 설명된다. 여성의 ‘자기계발’이나 ‘부자되기’ 담론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당시 글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편’을 조직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 속에서 소수자 혐오로 연결되는 ‘적대’의 세계관을 이미 읽어냈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전유해 생물학적 여성만의 권리를 요구하는 터프(TERF)의 움직임이 올해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가시화했다. 이들의 트랜스 혐오 논리는 서구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 본체는 한국 사회의 소수자 혐오에 뿌리내리고 있다. n번방과 같은 여성에 대한 위협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자들의 문제만 집중하겠다”는 분노 표현인 것이다. 문제는 “배타적인 여성범주에 기대어 누군가를 배척하는 운동이 여성들을 차별과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켜 평등하고 안전한 세계로 인도하지 못”하며 “‘여성’을 또 다시 성기로 환원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을 성기로만 축소시켜온 가부장제 문화를 답습”한다는 점이다.

손희정 연구교수는 지난 1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랟펨’의 등장을 보려면 “한국사회 키워드가 2015년 ‘헬조선’, 2016년 ‘여성혐오’였던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청년들은 혐오의 언어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여기서 흙수저 청년의 얼굴로 표상된 것은 ‘남성’이었다.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를 깨는 급진적 운동을 벌이면서, 남성 청년 모습만으로 표상된 헬조선 담론의 ‘혐오’를 끌어와 대응했다. 똑같은 헬조선에서도 소외받는 여성들의 분노를 혐오 이면에서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혐오가 운동의 지속가능한 동력이 될 수는 없다. 손 교수는 “여성들이 세력화를 하고 정체성의 정치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가부장제가 여성들에게 강요한 정체성과 얼마나 다른지, 해방적 정체성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104호 ‘디지털 페미니즘’에 대한 글에서 정치적 입장 차이에도 다양한 주체들이 사회적 의제를 함께 만들어낸 ‘낙태죄 폐지 운동’을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꼽았다.

이윤종 문화/과학 편집위원은 104호에서 “신자유주주의와 페미니즘이 기묘하게 결합”한 축소지향적 페미니즘이 아닌 ‘확장하는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여성을 비롯해 성소수자, 정치적 망명자 및 난민 등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는 다종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골고루 대변할 수 있는 일종의 철학적·정치적 신념”이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로부터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및 혐오 발언까지 방대한 영역에 대항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개개인의 젠더, 인종, 계급이 단일하지 않다는 ‘교차성’이다. 이를테면 흑인 페미니스트는 때로는 백인 페미니스트보다 흑인 남성과의 연대가 더 필요한 경우가 있고, 한국에서도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여성 간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수 있다. 여성들이 단일하지 않다면, 여성 전체를 위한 연대는 가능한 것인가. 그리하여 오늘날 페미니즘은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에 기반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정체성을 포괄하며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해 그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위계구조를 타파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이 편집위원은 통화에서 “최근 생물학적 여성만을 중시하는 흐름이 소수자와 연대로 성장해온 페미니즘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지 우려됐다”며 “한국에서도 이주자나 외국인 노동자 등 다양한 정체성의 여성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같은 사회적 의제로 뭉칠 수 있다면 확장하는 페미니즘의 기획이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0년대 이후 페미니즘 흐름은 전 지구적 현상이다. 문화/과학 104호에는 급진 페미니즘의 과거와 현재, 중국 영 페미니스트 운동, 재일여성 ‘위안부’ 운동과 포스트 식민 페미니즘, 게이와 페미니즘, 586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에 대한 분석도 실렸다.

지난 2월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두고 숙명여대 교내 게시판에 찬성과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지난 2월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두고 숙명여대 교내 게시판에 찬성과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사이버 성폭력 대응센터,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등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과 n번방 사건 피해자 공동변호인단이 지난 6월11일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법원 동문 앞에서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이들은 기자회견 직후 참석자 모두를 하나의 빨간 줄로 이어 함께 연대하고 있다는 의미의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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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회원들이 지난7월7일 서울 서초동 지방법원앞에서 ‘손정우 미국송환 불허 규탄연대’ 기자회견을 열고 피켓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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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지난 10월8일 열린 ‘정부의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 입법예고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지난 10월8일 열린 ‘정부의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 입법예고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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