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20주년 기획]“인권침해 아닌가요” 세상 바꾼 이웃들

강은·이두리·반기웅 기자 eeun@kyunghyang.com
2021.11.16 06:00 입력 2021.11.16 18:31 수정

학생 교복 명찰·직장 용모 규정 등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차별·불합리

인권위 작년 진정사건 8948건 접수

시민의 행동이 새 이정표 만들기도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진정사건은 총 8948건이다. 그 중에는 ‘어떻게 이런 작은 이슈를 국가기관에서 다루느냐’며 세상의 비웃음을 산 사건이 적지 않다. 그러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진정사건들이 인권위를 거쳐 세상에 나오는 순간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유죄 아니면 무죄라는 식의 흑백논리를 넘어 세상에 균열을 낸 인권위 권고는 대부분 우리 주변의 이웃이 낸 진정에서 나왔다. 지난 20년 간 평범한 시민이 끊임없이 인권위 문을 두드린 결과 ‘인권의 영역’이 점점 넓어졌다.

차별적인 법과 제도를 시정하는 것만큼 중요한 인권위의 역할은 시민이 일상에서 겪는 인권 침해를 구제하는 일이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 국가보안법 개정 내지 철폐, 차별금지법 제정 등 인권위 출범 초기부터 화두가 된 굵직한 현안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 사이 세상을 조금씩 바꾼 것은 시민이 낸 소소한 진정이었다. ‘살색’ 크레파스라는 인종차별적 명칭을 퇴출시킨 것도, 초등학교 출석부 번호를 남학생부터 부여해온 관행을 없앤 것도 평범한 이웃들이 해낸 일이다.

인권위가 오는 25일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인권위 20년사는 곧 시민의 손으로 인권의 지평을 한 뼘 한 뼘 넓힌 시간이었다. 경향신문은 16일부터 3회 연재하는 인권위 20주년 기획기사를 ‘시민’으로 시작한다. 작지만 의미있는 진정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교생 성적표와 고정식 명찰

학교의 전교생 성적표 통지와 고정식 명찰 부착이 인권침해라는 진정을 제기한 김정금씨(61)

학교의 전교생 성적표 통지와 고정식 명찰 부착이 인권침해라는 진정을 제기한 김정금씨(61)

2005년 대구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전교생의 성적 통지표를 학부모들에게 발송했다. 통지표에는 전교생의 이름과 성적이 고스란히 나열돼 있었다. 김정금씨(61)는 통지표를 모아 서울 중구에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가져갔다. “이 동네 모든 학부모가 그 학교 다니는 아이들 성적을 다 알게 된 거에요. 문제 아닌가요. 그래서 일단 증거 자료가 될 만한 통지표를 들고 인권위로 갔어요.” 김씨가 인권위에 낸 진정은 ‘사립학교는 인권위 소관이 아니다’라며 각하됐지만 그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자 해당 학교는 더 이상 통지표를 보내지 않았다.

김씨는 2009년 다시 인권위를 찾았다. ‘교복에는 명찰’이라는 등식을 당연시하던 때였다. “명찰이 교복에 아예 박음질이 돼서 나오니까, 안 붙일 수가 없었죠.” 그 때만 해도 명찰이 학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대구 참교육학부모회에서 활동하던 김씨에게 한 학부모가 상담을 요청했다. 학부모는 ‘명찰’ 때문에 아이가 위험에 처할 뻔했다고 했다. 낯선 남성이 하교 중이던 자녀에게 말을 걸었는데 남성이 자녀 이름과 학교, 학년까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복에는 색깔로 학년을 알 수 있는 명찰이 고정돼 있었다. 학생들에게 고정식 명찰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하나같이 부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명찰이 드러나는 게 너무 싫어서 학교에서 나올 때 꼭 명찰을 가릴 수 있는 겉옷을 입는다는 학생도 있었고, 자기 이름이 밝혀지는 게 싫어서 학원갈 때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간다는 애들도 있었죠.”

김씨는 그 때 고정식 명찰의 반인권성을 체감했다. “선생님은 명찰을 달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왜 아이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기 학교와 학년, 이름을 다 밝혀냐 하나, 이건 심각한 인권 침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 해 5월 참교육학부모회는 대구지역 일부 학교의 고정식 명찰을 시정해달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학교 측은 명찰 착용이 교복 분실 방지와 명찰 파손 예방, 학교 밖 일탈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며 맞섰다. 김씨는 학교 측 주장에는 학생을 ‘잠재적 문제아’로 보는 시선이 깔려있다고 생각했다. 2009년 11월 인권위는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및 전국 각 시·도·교육감, 그리고 진정이 접수된 대구 지역 학교의 교장들에게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까지 고정식 명찰을 교복에 부착하도록 하는 관행을 시정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 권고 이후 학교들은 고정식 명찰 관행을 시정했다. 다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명찰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자 예전으로 돌아간 학교도 있다. “인권위는 우리 학부모나 학생이 호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구예요. 하지만 한계도 있지요. 인권위 권고는 말그대로 권고일 뿐이니까요. 이제 이 권고를 넘어서서 어느 정도 강제력이 부여된 권한이 필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계부와 학부모 운영위원

‘친부가  아니면 학부모 운영위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차별이라며 진정을 제기한  김승규씨(65)

‘친부가 아니면 학부모 운영위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차별이라며 진정을 제기한 김승규씨(65)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노.” 김승규씨(65)는 40분이 조금 넘는 대화에서 ‘말도 안 되는’이라는 표현을 11번 사용했다. 경남 김해시 대동면 시골 마을에 살던 그는 2008년 재혼했다. 아내는 8살 딸아이를 데리고 김씨가 살던 곳으로 왔다. 밝은 성격의 아이는 김씨와 금세 가까워졌다. 아내의 딸은 이내 ‘우리 딸’이 됐다.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담임 선생님은 김씨의 아내에게 학부모 운영위원이 돼 달라고 연락했다. 아내가 ‘아이 아빠가 대신 하면 안 되겠냐’고 묻자 흔쾌히 ‘그렇게 하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입후보 지원서를 내자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김씨와 아이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학교 측은 ‘친부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거지. 우리 애 학교 생활부터 모든 걸 내랑 같이 하고 내가 책임졌는데, 친부가 아니라고 안 된다니.”

출마 여부를 떠나서, 김씨는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싶었다. 학교는 ‘경상남도교육청 지침이라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그 때 언론을 통해 접한 인권위가 떠올랐다. 그는 “법이 이미 그렇게 돼 있다는데 교육청 담당자랑 얘기해서 해결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인권위에 진정을 넣게 됐다”고 말했다. 인권위에 진정을 넣으면서 김씨는 아이와 관련된 모든 기록에 자신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먹이고, 입히고, 키운 것은 김씨였으나 딸의 학교 생활기록 어디에서도 ‘김승규’ 이름 세 글자를 찾을 수 없었다.

김씨는 ‘계부의 세상’을 조금 바꾸었다. 인권위는 교육부에 학교운영위원회 업무편람 개정을 권고했고, 교육부는 이 권고를 받아들였다. “인권위가 아니었으면 제가 어디 가서 얘기를 했겠습니까. 혼자 욕이나 하고 투덜투덜하다 말았겠지요.” 그러나 김씨는 아직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졌고, 그에 발맞춰 사회적 제도와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다고요. 요새 사유리 이런 사람도 있다 아입니까. 그게 (법적인) 가족이 아니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노.”

■흰머리 카지노 딜러와 염색

‘염색’을 강요하는 회사 방침에 용모차별이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김정춘씨(51)

‘염색’을 강요하는 회사 방침에 용모차별이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김정춘씨(51)

김정춘씨(51)는 카지노 딜러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카지노 딜러를 택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균열은 지난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집안 유전으로 유독 흰머리가 많았던 김씨는 평소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다녔다. 아버지의 49재를 지내는 동안 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고 싶었다. 그러자 김씨의 머리 색깔을 두고 회사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서비스업인데…” 영업부장 등 임원들은 김씨를 불러 흰머리를 염색하라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무엇이든 순순히 따르기보다 “왜 그래야 하지?”라고 되묻는 편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김씨는 염색을 하지 않았다.

3주가 지나자 회사는 사유서를 내밀었다. ‘머리 염색을 하지 않고 새치인 상태로 근무해 회사의 용모 준수사항인 그루밍(Grooming)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사유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인권위에 진정을 내고 회사의 그루밍 규정 개선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인권위는 김씨의 진정을 받아들였다. 회사의 염색 요구를 ‘용모 차별’로 봤다. “흰머리 여부는 카지노 딜러 업무에 영향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인권위 판단이었다.

회사가 김씨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원래’였다. ‘원래 서비스업은’, ‘원래 회사에서는’, ‘원래 카지노에서는’… 그럴 때마다 김씨는 ‘원래’라는 말로 응수했다. “원래가 뭔데요? 원래 사람은 나체였어요!” 대놓고 말은 안 했어도 주변 동료들 9할은 김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김씨에게 인권위는 ‘마지막’이었다. “여기 아니면 내 얘기를 들어줄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것이었다. 흰머리 하나 때문에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김씨의 대답은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다. “제 자식들은 그런 세상에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회사와 싸우면서 유난히 딸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우리 자식 세대는 적어도 지금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작은 거라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애인과 스카이바이크

장애인은 비장애인 보호자 2명 이상이 동승해야 스카이바이크를 탈 수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  이종순씨(68)

장애인은 비장애인 보호자 2명 이상이 동승해야 스카이바이크를 탈 수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 이종순씨(68)

해안가를 따라 페달을 밟는 ‘스카이바이크’는 충남 보령시의 관광 명물이다. 2017년 8월 여름을 맞아 대천해수욕장을 찾은 총회농아인선교회 청각장애인 목사 9명과 건청인 전도사 1명도 스카이바이크 줄에 서 있었다. 이윽고 탈 차례가 됐지만 이들은 끝내 레일 위를 달릴 수 없었다. 업체 측이 탑승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보령시 스카이바이크 운영조례에 있었다. 보령시 스카이바이크 운영조례는 영유아, 어린이, 노약자, 장애인 등의 승차시에는 보호자가 2명 이상 동승하도록 했다. 장애인들은 조례 앞에서 비장애인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뭉뚱그려졌다.

봉화농아인교회 목사 이종순씨(68)는 그해 9월 인권위에 “비장애인 보호자 2명 이상이 동승해야 스카이바이크를 탈 수 있도록 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진정서를 접수했다. 이씨는 “당시 청각장애인 일행은 모두 만 40세 이상의 성인으로 운전면허도 취득했고, 오토바이를 타는 분도 있었다”고 했다. 25살 때 청력을 완전히 잃은 이씨는 두 차례에 걸쳐 단양에서 행글라이더 비행을 한 경험도 있었다. 이씨는 “미리 수화통역으로 안전교육을 받았고 상공에서 영상 촬영도 했다”며 “조종기사 분이 손짓으로 안내도 하면서 비행했는데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은 달랐다. 인권위 진정 당시 보령시장은 “스카이바이크는 차체의 무게, 오르막이 있는 레일 구성 등으로 인해 운행에 근력이 필요하므로 장애인 탑승시에는 비장애인 보호자 2명이 동승해야 한다”며 “청각장애인은 비상 방송을 들을 수 없는 등 응급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이같은 주장이 장애인을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어린’ 사람으로 여기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 장애인이라고 하면 무시하기도 하고, 나이가 15살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반말로 대할 때가 많거든요.”

2018년 4월 인권위는 장애 특성이나 개인별 근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비장애인 보호자 2명의 동승을 요구한 것은 차별 행위라고 인정했다. 인권위는 “비장애인도 개인별로 근력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탑승 제한이나 보호자 동승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서 “청각장애인이더라도 개인에 따라 청력이나 응급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다른데 그에 대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고려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해 12월 보령시는 인권위 권고에 따라 해당 조례에서 “스카이바이크에 장애인 승차시 비장애인 보호자 2명 이상이 동승해야 한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이씨는 “인권위 진정 이후에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며 “차별을 개인의 잘못으로만 보지 말고, 인권위에서 적극 나서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검사 임용과 정신 질환

법무부가 검사 선발을 위해 신원정보 조사를 진행하면서 ‘정신질환 진단 여부’를 포함한 것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김병민씨(26)

법무부가 검사 선발을 위해 신원정보 조사를 진행하면서 ‘정신질환 진단 여부’를 포함한 것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김병민씨(26)

김병민씨(26)의 양손에는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흉터가 있다. 지난해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책상에 앉을 때마다 부담감에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강박적으로 손등을 긁었다. 상처가 생겨 딱지가 앉고, 딱지가 생긴 곳을 다시 긁어냈다. 흉터가 점점 커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해봤다. 논문도 여러 편 찾아 읽었다. 그제서야 “정신질환 때문일 수 있겠구나”라고 알아챘다.

병원에 가야 했다. 그러나 정신과 진료가 검사 임용 때 불이익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공부해야 할 것은 많은데 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너무 불안했거든요. 머리도 아프고 잠도 못 자서 병원에 가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었어요.” 막연하게나마 검사를 꿈꿨던 그는 “(검사 임용 시 필수로 제출해야 하는) 질문지에 정신질환 진료 여부를 묻는 항목이 있다는 걸 알고 무력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무력감에 지고 싶지 않았다.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교실 이데아> 가사가 김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씨는 지난해 7월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정신과 진료를 일단 받고 나서 서류에는 받은 적 없다고 표시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건 검사가 될 사람보고 거짓말을 하라는 거잖아요.”

인권위는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검사 임용시 제출해야 하는 신용진술서에 정신질환 전력에 관한 문항을 삭제하도록 권고했다. 법무부는 권고를 수용해 올해부터 이 조항을 삭제했다. 문제는 해결됐지만 김씨는 더 이상 검사를 꿈꾸지 않는다. 지금은 막연히 노동 인권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투사가 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저 임금체불이나 정해진 수당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사건을 맡고 싶어요.”

김씨가 인권위에 진정을 넣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스무살에 아버지가 됐고, 이듬해 지금 아내와 결혼했다. 김씨도, 아내도 너무 어렸다. 아이를 맡길 곳이 필요했다. 당시 보건복지부 지침에 따르면 대학원생 부모는 어린이집 입소 우선 순위에 포함됐으나 대학생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 학업과 생계, 육아의 틈새에서 절박했던 김씨는 지난해 인권위에 진정을 넣고 헌법소원심판도 청구했다. 이후 복지부 지침이 바뀌었다.

김씨는 자신에게 인권위는 ‘사각의 링’과 같다고 했다. “제가 직접 소송을 제기했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을 거예요. 아직 검사임용에 지원하기 전이라 직접적인 피해를 본 게 없다며 소송에서도 졌겠죠. 인권위 진정을 통해서 저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의 문제까지 같이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설마 될까?’라는 생각이 ‘되는구나’로 바뀌었습니다. 인권위는 저한테 다툴 수 있는 판을 깔아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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