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영어·일본어에 제주 사투리까지···미국 드라마 ‘파친코’ 누가 번역했을까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2022.04.12 11:00 입력 2022.04.13 00:27 수정

영어·한국어 대본 오가며 1년 이상 번역 작업한 황석희씨

“원문 모를 수준의 100년 전 사투리…해외 프로덕션이 용감한 결정”

“한국인이라면 저 대사가 무슨 뜻,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난 이민자 가족의 삶을 다룬 애플tv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애플tv플러스 제공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난 이민자 가족의 삶을 다룬 애플tv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애플tv플러스 제공

“경해도 넌 그 도박해싼다. 미국, 가라” “아부진 마씨?” “난 무사?” “우린 혼몸이라해수게. 붙어있어 된다 할 땐 언제고.”(“그래도 넌 그 도박해야 한다. 미국 가라.” “아버지는요?” “나는 왜?” “우리는 한 몸이라면서요. 붙어있어야 된다고 할 땐 언제고.”)

“그 샤쓰도 버릴낍니꺼…. 사람을 개밥으로 던진다 카던 분이 저 보고 희한하다꼬예. 내일 빨래터로 가져오이소. 즘심 전에 빨아드릴게예.”(“그 셔츠도 버릴 겁니까…. 사람을 개밥으로 던진다고 하던 분이 저더러 희한하다고요. 내일 빨래터로 가져오세요. 점심 전에 빨아드릴게요.”)

애플tv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에는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주인공들이 일제강점기에 고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거친 이민자 가족인만큼 한 화에서 한국어, 일어, 영어가 모두 쓰이기도 한다. 그 시절 부산 사투리와 제주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냈고, 자이니치(재일 동포를 이르는 말)가 쓰는 한국말은 당사자의 의견을 구해 다듬었다. 부산, 뉴욕, 오사카를 오가는 다양한 세대의 인물의 대사가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번역가와 방언 전문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대본 번역에 참여한 황석희씨를 최근 화상으로 만나 작업 과정을 들었다. 황씨는 <데드풀>, <스파이더맨> 시리즈 등 영화를 비롯해 <왕좌의 게임>, <뉴스룸> 등의 TV시리즈, 다큐멘터리, 뮤지컬 등 영어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해 왔다.

영도에 사는 선자(김민하)와 새로 부산에 온 수산업자 고한수(이민호)는 사랑에 빠진다. 애플tv플러스 제공

영도에 사는 선자(김민하)와 새로 부산에 온 수산업자 고한수(이민호)는 사랑에 빠진다. 애플tv플러스 제공

황씨에 따르면 당초 대사들은 각본가 겸 프로듀서인 수 휴 등 미국 작가진에 의해 모두 영어로 쓰여졌다. 수 휴는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지는 못한다. 영어 대본을 직역해 바로 대사로 쓸 수는 없었기 때문에 황씨가 대본을 한국어로 옮겼다. 극 중 수산업자 고한수(이민호)는 젊은 선자(김민하)의 보따리를 들어주려다, 선자가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고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마”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처음에 “You must know it. I mean no harm(너도 알잖아. 나는 해를 끼치지 않아)”라고 적혀 있었다. 황씨는 이렇게 직역하면 다소 어색한 표현을 한국어로 알맞은 말로 바꿨다. 바뀐 대사는 미국 작가진에 다시 영어로 ‘역번역’돼 전달됐다. 이 표현이 한국에서 쓰이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설득하는 것은 황씨 몫이었다. 한번은 술집에서 남자들이 서로 “이 양반이” “저 양반이”라며 아웅다웅하는 장면을 두고 미국에서 ‘저 사람의 신분은 양반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피드백이 오는 일도 있었다.

황씨는 “영어로 ‘안 잡아먹는다’라는 말이 얼마나 어색하겠나. 한국에서 이 말은 이런 의미고, 자연스러운 문장이라고 일일이 계속 설득해야 했다”며 “한국어로 도저히 알맞은 뉘앙스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 다른 영어 문장을 써서 주실 때도 있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영어로 쓰여진 <파친코>의 대본을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 황석희씨. 본인 제공

영어로 쓰여진 <파친코>의 대본을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 황석희씨. 본인 제공

한국어로 번역한 대본에 사투리를 입히는 데에는 또 다른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황씨는 연극배우 정마린, 변종수 씨와 함께 부산 사투리와 제주도 사투리 번역에 돌입했다. 배우들이 직접 쓴 사투리 대사를 읽으면 그것을 녹음해뒀다가 함께 몇 번씩 듣고 고치면서 대사를 완성했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제주도 사투리는 제대로 구현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주도 사투리는 표준어와 차이가 큰 만큼 한국 드라마에서도 어미만 살짝 바꾸거나 감탄사만 넣는 등 조금 순화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파친코>는 100년 전 제주 사람들이 쓰던 걸쭉한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황씨는 “변종수 배우가 이전에도 여러 작품에서 사투리 자문을 맡았는데, 이렇게 완전히 옛날 사투리를 다 쓰는 일은 없다고 하셨다. 내가 번역했지만 원문이 뭐였는지 모를 수준의 사투리인데, 해외 프로덕션이 만드는 <파친코>가 용감한 결정을 한 것 같다”며 “배우들이 외우기도 까다로워서 혹시 배우가 안 되겠다고 하면 사투리 농도를 좀 낮추려고도 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연습하면 다 할 수 있다’며 살벌한 난이도의 대사를 정말 훌륭하게 소화해주셨다”고 했다.

선자의 손자 솔로몬(진 하)은 뉴욕과 오사카, 도쿄를 오간다.  애플tv플러스 제공

선자의 손자 솔로몬(진 하)은 뉴욕과 오사카, 도쿄를 오간다. 애플tv플러스 제공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 솔로몬(진 하)과 모자수(소지 아라이)가 쓰는 말은 일본어 번역가들이 다시 손을 봤다. 자이니치의 의견을 들어 진짜 자이니치가 쓰는 말로 바꿨다고 한다. 솔로몬이 노년의 선자(윤여정)를 부르는 ‘함매’라는 말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완성된 대본은 다시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거쳤다. ‘여보’, ‘아내’와 같은 어휘가 당시 실제로 쓰였는지 확인하는 류의 작업이었다. 각 배역을 맡은 배우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대본을 고치기도 했다. 황씨는 “수정하는 과정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수정할 때마다 원고를 빨주노초부터 시작해 화이트, 골드, 핑크 버전 색깔로 이름 붙였는데, 색을 몇 가지를 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번역 작업은 1년 넘게 지속됐다. 배우들은 대본대로 말하는 게 원칙이었고, 애드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황씨는 “내가 이전까지 했던 자막 번역은 배우들이 뱉은 걸 자막으로 만든 작업이었다면 이번 대본 번역은 내가 쓴 대사를 배우들이 발화하는, 지금까지와 방향이 반대인 작업이었다. 단순 자막 번역이었다면 8일 만에 끝날 일을 1년 넘게 붙잡고 있었고, 새벽에도 여러 통씩 전화를 받았다.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하는 작품이 평생 또 있을까 싶다”며 “해외 프로덕션에서 한국을 가장 크게 다룬 작품이기도 하고, 좋은 작품이기도 해서, 번역을 했다는 게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자막 번역은 주로 혼자 하는 일인데 이번에는 팀을 느꼈다. 스스로 의심했던 대사들이 배우분들에 의해서 멋있게 재현될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팀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부족한 것을 팀 구성원들이 완성해준다는 느낌이 들어 든든하고 행복했던 작업”이라고 했다.

노년의 선자는 배우 윤여정이 연기했다. 애플tv플러스 제공

노년의 선자는 배우 윤여정이 연기했다. 애플tv플러스 제공

여러 언어가 뒤섞여 나오지만 한국인이라면 드라마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한국인이라면 평생 듣고 살아오며 체감한 문화가 있다. 저 대사가 무슨 뜻이구나, 저 단어가 왜 나왔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파친코>는 감성적이면서도 직관적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며 “제주도 사투리, 자이니치가 쓰는 말 등은 한국어라도 자막을 켜고 감상하는 것도 좋다. 자이니치가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 보면 느끼는 게 많을 것 같다.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재미가 많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언젠가 작품 대본을 쓰는 건 아니냐’는 질문에는 “만드는 재주나 깜냥은 없는 것 같다. 번역처럼 만들어진 것을 가공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건 잘 한다”며 웃었다.

※기사가 보도된 뒤 황석희 번역가가 번역 작업에 걸린 기간을 ‘반년 넘게’에서 ‘1년 넘게’로 수정 요청해와 기사의 일부 내용이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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