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월대 밑에서 쇠고리·석렬 등 조선 초기 시설 확인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2023.05.30 11:50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월대 축조 이전 광화문 앞 활용 첫 물적 증거”

쇠고리는 궁중행사 차일용…근정전 등에도 있어

광화문 월대 아래 조선 전기 문화층에서 발견된 차일 고정용 철제 쇠고리(왼쪽)와 조선 전기의 시설인 석렬 모습.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광화문 월대 아래 조선 전기 문화층에서 발견된 차일 고정용 철제 쇠고리(왼쪽)와 조선 전기의 시설인 석렬 모습.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광화문 월대의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궁중행사용 햇빛 가리개인 차일을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추정되는 조선 전기(14~16세기)의 쇠고리가 발견됐다.

고종 당시 월대의 축조(1866년) 이전에 이미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왔으나, 물적 증거가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쇠고리 장치는 경복궁 근정전과 종묘에도 있다.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는 “고종년간 월대의 어도(임금이 다니는 길)지 서쪽 기초시설 아래에 있는 조선 전기 문화층에서 석렬과 함께 철제 쇠고리가 박힌 사각형 석재를 확인했다”며 “쇠고리는 직경 6㎝, 쇠고리가 박힌 석재는 76×56×25㎝ 크기”라고 30일 밝혔다.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쇠고리. 궁중 행사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일을 고정시키는 장치다.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쇠고리. 궁중 행사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일을 고정시키는 장치다.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문화재연구소는 “고종 당시 월대의 축조 이전에 이미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된 사실은 기록으로 전해져 왔는데 이번에 물적 증거인 쇠고리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쇠고리 형태는 궁중 행사에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차일을 고정하기 위한 장치와 유사하며,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월대의 축조 이전에 이미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된 사실은 ‘광화문 밖 장전(帳殿·임금이 앉는 임시 자리)에 납시어 친히 무과 시험을 보았다’(세종실록 97권·1442년), ‘광화문 밖에 이르러 산대놀이를 구경하고 한참 뒤에 들어왔다’(중종실록 90권·1539년) 등에서 확인된다.

광화무 앞 지층의 퇴적 양상.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광화무 앞 지층의 퇴적 양상.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연구소 측은 “이번에 발견된 조선 전기 석렬의 잔존너비는 약 85㎝로 크고 작은 석재가 일정한 너비를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형태”라며 “월대의 어도지 아래층에 전체적으로 유사한 양상의 조선 전기 유구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현재까지 광화문 앞 공간의 퇴적·활용 양상도 확인됐다. 연구소는 “광화문 밖 공간의 퇴적양상은 자연층에서 조선 전기 문화층(14~16세기)과 조선중·후기 문화층(17세기 이후), 월대 조성층(19세기)을 거쳐 근현대 도로층(20세기)의 순으로 형성됐다”며 “조선 중기~후기 유구에서는 민가의 흔적 등도 확인돼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방치돼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소 측은 “발굴조사를 종합하면 광화문 앞 공간에서는 고종년간 월대와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부터 바닥에 돌을 깔아 축조하는 방식의 시설들을 갖추고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방치된 채 관리되지 못하다가 고종년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월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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